긴장의 연속이었다. 시작부터 끝까지 마치 무슨 일이 갑자기 벌어질 수도 있다라는 암시들이 계속해서 나를 거드렸다. 그 긴장감은 흡입력으로 다가왔고, 어쩔 수 없이 마지막 장 까지 읽을 수 밖에 없었다. 처음 부터 시작은 마치 스릴러 영화를 보는 것처럼 시작된다. 그리고 어쩌면 자극적일지도 모르는 소재로 궁금증을 증폭시켰고, 그런 것들을 어쩌면 즐기고 있는 나 같은 독자를 마구 휘둘렀다.


책에 대한 사전 정보없이 읽기를 시작하면서, 이 책이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다라는 생각은 책의 2/3 지점까지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두 형제인 '기현'과 '우현'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갈등과 뜻하지 않은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다가 어느 순간 '어머니'의 시점으로 그리고 또 다시 '아버지'의 시점으로, 다시 '기현'이 바라보는 '우현'의 시점으로 변해가며 '사랑'이라는, 어쩌면 '삶'이라는 것의 숭고함과 깊은 성찰까지 보여준다. 


책을 덮고 나서는 머릿속으로 두 가지가 잔상으로 진하게 남았다. 

하나는 책의 제목 <식물들의 사생활> 처럼 작품의 주요 장소인 남천의 모습이었다. 야자나무와 그 숲, 바다를 품고 있는 나무의 모습이 머릿 속으로 그려졌다. 어쩌면 살짝 두려워 보이는 공간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하고 신비한 공간인 모습. 사실 나는 평소에 이 세상의 주인은 어쩌면 '인간'이 아니라 '나무'라고 생각한 적이 많이 있다. 그리고 은연 중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하곤 했다. 그들이 비록 움직이지 못하지만 모든 곳의 생명의 근원에는 '나무'가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여전히 있다. 그래서 인지 몰라도 작품의 전반을 통해 드러나는 나무의 모습이 무엇보다 강하게 남는다.


(p216) 내 꿈의 마지막은 신비스럽고 경이롭고 기모해요. 밤이면, 그들이 벌판에서 만나 별을 보며 끝없이 사랑을 맹세했던 그 밤이 오면, 두 그루의 나무는 놀랄 만큼 민첩하게 움직여요. 온 감각과 에너지가 뿌리로 집중해요. 뿌리는 쏜살같이 빠르게 바다 밑으로 뻗어나가요. 나무의 뿌리는 바다 밑을 가로질러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달음질쳐요. 바다 밑은 달려온 두 나무의 뿌리는 바다 한가운데서 만나 서로 엉켜요. 나무의 뿌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손처럼 부드럽게 뻗어 상대방을 애무하고 끌어안아요. 애무는 부드럽고 포옹은 뜨거워요. 무슨 꿈이 이럴까요? 꿈이 너무 선명해요. 현실처럼 또렷하고 구체적이기까지 해요. 꿈은 꾸는데 내 얼굴을 진짜로 누군가 만지는 것 같았어요. 그녀가 나였을까요? 왜 이렇게 이상한 꿈을 꾼 걸까요?"


(p250) 나무가 되고 싶다고 했다. 하고 아버지가 다시 말을 이었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숲의 어둠 속으로 꽃처럼 떨어졌다. "내가 품에 안자 우현이는 몸을 떨며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의 눈물을 닦아주지 않았다. 나는 눈물을 흘리게 내버려두었다. 눈물이 그를 정화하기를 기대했다. 그의 슬픔과 고통과 갈망이 눈물과 함께 그의 몸 밖으로 빠져나가기를...... 눈물이 잦아들자 우현이 말했다. 나무가 되고 싶어요. 내 품에 안겨서 그 말을 되풀이 했다. 나무가 되고 싶어요..... 나는 말했줬다. 너는 이미 나무다. 나무를 꿈꾸는 사람은 나무의 영혼을 가진 사람이고, 나무의 영혼을 가진 사람은 이미 나무인 것이다." 그렇게 말할 때 나는 아버지가 진심으로 형을 사랑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머지 하나는, 책의 마지막 후반부에 보이는 가족들의 저녁 식사자리이다. 가족 서로 간에 사랑도 없이, 마치 가족으로 이루어졌으니 어쩔 수 없이 사는 것 같은 모습과는 다르게 그 침묵 속에는 그들만의 사랑이 있었다. 어쩌면 그 어떤 가족보다 숭고한 사랑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사랑에도 어쩌면 조금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 사소한 노력에 어쩌면 '기현'은 애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현'의 모습에서 계속해서 기현의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졌고, '우현'의 모습에서는 '어머니'의 모습이 연결되면서 각자의 가슴 속 깊은 곳까지 바라봐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만약, 누군가 책의 한 장면만을 뽑아 달라하면 나는 단연 이 부분을 선택할 것이다. 이 한 줄을 읽었을 때 머릿 속이 쿵 했고, 가슴 속이 저려왔다. 숨 멎은 듯 읽고 있는 내가 그 순간 긴 숨을 토해냈다. 


(p221) 나는 그녀를 남천, 야자나무가 서 있는 절벽 위의 그 집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 내 역할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지막으로,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글귀로 마무리한다. 


(p276) 사랑에 대한 성찰은, 그것이 최상의 수준으로 이루어질 때, 삶의 의미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런 성찰은 오늘날처럼 삶이 무의미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회의가 강화될수록 더 심오해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2000년대가 시작된 첫 해에 출간된 이승우의 장편소설 <식물들의 사생활>이 십수년이 지난 지금에도 무게를 잃지 않고 있는 것은 우리가 처해 있는 조건이 변하지 않았거나 더 악화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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