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 로 작가 은희경을 처음 만났습니다. 처음에는 이상하게 손이 잘 안 가던 작가였습니다. 그런데 한 번 접하고 나니, 벗어날 수 없게 만듭니다. 그녀가 점점 궁금해졌습니다. 


토요일 오후, 회사를 마치고 집 앞 도서관에 갔습니다. 가끔씩 어떤 책을 읽을지 정하지 않고, 도서관을 둘러보는데 그 재미가 쏠쏠합니다. '역사' 쪽에서 책을 몇 권 선택하고, '영미문학' 쪽에서 책 한 권, 그리고 한국문학 쪽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책들 중에서 '은희경' 이라는 이름 석 자가 다시 눈에 들어왔습니다. 바이링궐 에디션 한국 현대소설 시리즈에 있는 그녀의 작품 『빈처』 였습니다.

영어 제목은 『Poor Man's wife』 네요. 의자에서 살짝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응시하는 작가의 표정이 상당히 인상적인 표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책을 쇼파에 누워서 읽고 있었습니다. 첫째와 둘째는 컴퓨터에서 만화를 보고 있고, 막내는 여기 저기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아내는 주방에서 삼계탕을 끓인 다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책을 조금씩 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짧은 단편 소설을 읽으면서 최근에 책을 읽으면서 느끼지 못했던 기분이 들었습니다. 갑자기 내 생각이 번뜩했고, 누워서 읽던 몸을 다시 바로 세웠습니다. 어쩌면 대단히 일상적인 부부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하지만 너무나도 현실적이어서, 다들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부분을 건드려서 그런지 몰라도 상당히 묵직하게 다가왔습니다.


소설은 어느 날 내가 아내의 일기장을 보게 되면서 시작됩니다.


6월 17일

나는 독신이다. 직장에 다니는데 아침 여섯 시부터 밤 열 시 정도까지 근무한다. 나머지 시간은 자유이다.

이 시간에 난 읽고 쓰고 음악 듣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외출은 안 되지만.


나는 생각한다. 아니 두 아이의 엄마이고, 남편도 있는 사람이 독신이라니? 하지만 아내의 일기를 읽다 보면 알게 됩니다. 아내는 독신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회사 영업부에서 일하는 남편은 매일 저녁 술에 취해 들어오고, 집안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아내는 그런 자신을 독신으로 표현한 것이죠.


9월 16일

나는 왜 이렇게 쉬운 여자인가.

새벽에 파고 드는 그이를 안는데 이상하게 눈물이 핑 돌면서 사는 게 다 안쓰럽기만 하였다. 아침에 그이는 다정하다. 일찍 들어올게, 하더니 정말로 일찍 들어왔다. 나는 그만 감격해서, 저는 당신이 얼마든지 주무르고 어를 수 있는 여자여요, 하듯이 다소곳해져 갖고 그이를 맞았다. 그런데 그이는 다시 나간다. 나는 왜 이렇게 쉬운 여자인가. 그이에게 나는 왜 이렇게 하찮은가. 열한 시가 넘도록 들어오지 않는데 오늘만은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화가 난다기보다 모욕감 같은 것이 들었다. 그렇다, 이것은 아내에 대한 사랑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먼저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오랜 만에 집에 빨리 들어온 소설 속의 나는 친구의 전화에 또 다시 술집으로 나갑니다. 아내는 남편이 빨리 들어왔다고 조금은 들떠 있습니다. 무엇을 해줄까 하는 생각뿐이죠. 그런데 남편은 다시 집을 나섭니다.


이런 아내는 남편을 보면 평소에 다정다감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아이들도 잘 키우고 평범하게 살아갑니다. 하지만 아이들을 키우면서 아내는 아이를 낳기 이전의 모습은 많이 사라집니다. 아무리 피곤해도 아이의 칭얼거리는 울음소리에는 몸이 움직입니다. 힘이 들어도 자기 몸 보다 가족을 먼저 생각합니다.


아내는 그렇게 그녀의 담담한 삶의 일기를 적어갑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남편 역시 아내의 일기를 읽으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아내가 안쓰럽기도 합니다. 그런 아내의 잠자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죠. 많이 변한 아내의 모습이 보입니다. 


소설의 마지막입니다.


나는 손에 펴 들고 있던 그녀의 일기장을 가만히 덮어준다.

살아가는 것은, 진지한 일이다.

비록 모양틀 안에서 똑같은 얼음으로 얼려진다 해도 그렇다,

살아가는 것은 엄숙한 일이다.


작품 속에는 나와 아내의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어쩌면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이 시대의 남편과 아내들을 그리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소설이 묵직하게 다가오는 이유가 있습니다. 허구의 문학인 소설이지만, 허구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저의 삶을 보여주고 있는 거 같기 때문입니다. 평범하고 행복한 가정이라고 생각하는 제 생각, 이런 행복을 유지했으면 좋겠다는 생각, 하지만 그 속에서 다른 가족들의 마음을 헤아리지는 못하는 모습이 어쩌면 많은 사람들에게 존재하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평범' 이라는 단어로 말하지만, 그 평범을 구성하는 많은 것들은 분명히 다를 것입니다. 가족 안에서도 모든 걸 평범하게 생각하지 않아야 겠습니다. 아내의 마음과 생각을 조금 더 그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조금 더 아이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봐야 겠습니다. 여자와 남자는 많이 다릅니다. 그 다름을 존중하고, 그 다름을 조금 더 관심있게 바라봐야 겠습니다. 살아가는 것은 진지한 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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