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들과 서점에 들렸다. 책을 좋아하고 서점에 가는 것을 즐기지만, 아이들을 데리고 서점에 가는 경우는 드물었다.

서점이라는 간판을 보면 반갑고 신기할 정도로 동네에서는 사라져가고 있다. 

이렇게 아이들을 데리고 가려면 대형쇼핑몰에 입점해 있는 서점으로 가야한다. 

그러다보니 서점을 가려고 가기 보다는 다른 일로 쇼핑몰에 갔다가 서점으로 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번에도 역시 서점을 목적으로 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랜만의 서점 나들이에 가족들은 모두 한 권의 책을 손에 잡았다.


아내는 요리 코너를 한참 서성이다 샐러드 요리책을 한 권 골랐다.

첫째 아이는 요새 한창 빠져있는 『마법천자문』 5권을 손에 꼭 쥐었다. 

이 책을 몰랐을 때는 도대체 이 책이 뭔데 항상 온라인서점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오나 궁금했다.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천자문을 손오공이 나오는 만화로 표현한 책이었다. 

둘째 아이는 한 때 대형마트 주변 교통을 마비시키기도 했던 '터닝메카드' 스티커들이 가득찬 『터닝메카드 스티커북』을 보며 웃음짓는다. 막내 아이는 그저 좋다고, 서점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만져보기 바쁘다.


나 역시 서점을 그냥 나서기가 아쉬워 예전부터 읽으려고 정리해둔 목록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선택한 책이 예전에 다른 블로그를 보고 관심을 가지게 된 마르셀 에메의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다.


▲ 몽마르트에 있는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조각상 

사진출처 : 블로그 (현실과 이상사이)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는 총 다섯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단편집이다. 

  ◎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 생존 시간 카드

  ◎ 속담

  ◎ 칠십리 장화

  ◎ 천국에 간 집달리



단편집을 읽으면서 마르셀 에메의 글에 매료되었다. 

근래에 읽은 단편집 중에 몇 권을 뽑으라면  체호프의 『체호프 단편선』,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 이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마르셀 에메의 단편도 다음에는 어쩌면 내가 기억하는 단편집으로 뽑을 것 같다.



■ 당신은 한 달에 몇 일을 살 수 있을까요?


다섯 편의 단편 중에 가장 흥미로웠던 소설은 『생존 시간 카드』 였다.


항간에 터무니없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새로운 배급제에 관한 소문이다. 식량과 생필품 부족에 대처하고 노동계급의 수익 향상을 도모하기 위해 비생산적인 소비자들, 이를테면 노인, 퇴직자, 금리생활자, 실업자, 기타 다른 군입들의 생존권을 박탈하라는 것이다. (P39)


당연한 얘기지만 그 법령의 취지는 쓸모없는 사람들을 죽이자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들의 생존 시간을 줄이자는 것뿐이다. 말레프루아가 설명하기를, 쓸모없는 사람들은 한 달을 다 사는 게 아니라 그 무용성의 정도에 따라 일수를 정해놓고 다달이 그 일수만큼만 살게 될 거라고 했다. 그들에게 발급될 생존 시간 카드는 벌써 인쇄되어 있는 듯하다. (P40)


자기 생존 시간 배급표를 팔겠다는 그의 제안은 나를 몹시 난처하게 만들었다. 나 자신이 마치 동화에 나오는 식인귀나 사람을 공물로 받았다는 옛날이야기 속의 괴물처럼 느껴졌다. 나는 더듬거리며 반대의 뜻을 밝히고 그의 배급표를 거절했다. 그 대신에 아무런 대가 없이 그에게 약간의 돈을 주었다. (중략) 나는 도저히 그를 설득할 수 없어서 결국 배급표 한 장을 받고야 말았다.


아주 큰 부자인 바데 씨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그는 6월 30일에서 7월 1일 사이에 무려 1천9백67일, 즉 5년하고도 4개월을 살았다고 한다. (P70)


지금껏 접한 어떤 소설에서도 접하지 못한 소재이고, 작가의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라 이 소설을 소개하고 싶었다.

식량과 생필품의 부족해서 정부에서는 사람들의 유용성에 따라서 한 달에 몇일을 살 수 있는지를 정해둔 생존시간카드를 배급한다. 어떤 기준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사람들마다 생존시간 카드가 배급되고 작가인 소설 속의 화자는 한 달 중 15일 살 수 있는 생존카드를 받는다.


시작부터 불편하다. 여기서는 구분이 명확하다. 사람들의 유용성으로 생존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선정한 유용성의 기준으로 사람들이 서열화 되어지고, 구분되어진다. 

그리고 생존카드는 거래가 되어지고, 형편이 어려운 노동계급들은 얼마 안되는 생존시간 조차 살기가 힘들어 돈이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카드를 판다. 그리고 구매자는 그만큼 한달 동안에 살 수 있는 시간이 연장된다. 

소재는 현실에 있을 수 없는 환상 소설 같지만, 작가는 분명히 무언가를 꼬집어서 비틀듯이 이야기하고 있다. 

마르셀 에메의 이 작품이 발표된 시기는 1940년대 프랑스이다. 그 당시의 프랑스의 어떤 모습을 작가는 표현하고 싶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76년이 지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의 모습은 어떠한가? 라고 자문해 볼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생존 시간 카드라는 유형적인 것은 배급받지는 않았으나, 분명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의해서 그 카드를 무형으로 받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과연 나만의 생각일까.


하지만 소설 속의 이야기는 흥미롭다. 어떤 이가 만약 한 달 중 18일을 살 수 있다면, 그 달의 18일 자정이 되는 순간 연기처럼 사라진다. 그리고 다음 달의 1일이 되면 전 달에 사라졌던 장소로 돌아온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라지는 순간을 염두해두어야 한다. 누군가는 기차를 타고 어딘가에 사라져버리고, 누군가 침실에서 사라진다.

다음 달의 1일이 되면 누군가는 기차를 타고 가고 있고, 누군가의 침실에서는 장소를 잘 못 맞춘 여러 명의 사람이 나타나기도 한다. 



■  프랑스 문학의 희귀한 보석, 마르셀 에메 Marcel Ayme


▲ 마르셀 에메 (1902년 3월 29일, 프랑스 - 1967년 10월 14일)


작가의 사진을 찾아보았다. 실제로 어떤 성격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큰 눈에 짙게 위로 솟은 눈썹, 눈썹과 조화를 이루는 듯한 귀가 눈에 띈다. 왼쪽 입고리가 살짝 올라가며 주름진 입가에는 장난기가 가득해 보인다.

내가 접한 그의 소설은 짧은 단편 5편이 수록된 이 한 권의 책에 불과하다.

하지만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분명 마르셀 에메 만의 독특한 색깔과 기발한 상상력이 눈에 띈다.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면서 전개되는 이야기, 익살스럽지만 날카로운 일침도 놓치지 않는 모습 또한 인상 깊다.

왜 프랑스 문단에서 '희귀한 보석' 이라는 표현을 그에게 선사했는지 짧게나마 이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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