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5
프랑스는 흉작을 겪고 있었다. 식량 부족과 그에 따른 물가 폭등, 그중에서도 특히 비싼 빵값으로 인민이 고생해야 하는 상황은 아직 조금도 해결되지 않았다. 베르사유가 이상하다는 것도, 그 상황을 모른 체하고 좋은 술과 맛있는 음식을 실컷 포식하며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파리는 프랑스 전역이 겪고 있는 곤경에서 혼자만 예외가 될 수 없다.

p17
귀족을 적으로 삼고 있는 파리에는 동정심도 공감도 있을 수 없었다. 전국삼부회에서는 제3신분 대표 의원들이 곤경을 강요당했고, 그것이 국민의회로 다시 태어났지만 여전히 사태는 쉽사리 호전되지 않는다. 파리가 이런 상황을 간과하지 않은 것은, 원래 파리라는 곳에서는 서민 감정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세기에 왕실에 베르사유로 거처를 옮기자 귀족들도 대거 파리를 떠났다. 남겨진 것은 평민뿐이었고, 이 평민들이 오늘날까지 왕국 제1의 거대도시를 꾸려나가고 있었다.

p19
6월25일, 우선 도핀 가의 뮈제 홀에 모인 선거인든은 그날로 시청으로 이동하여 생장 홀에 회의장을 얻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 후로는 시의회 같은 지위를 차지하고 시정에 참견하게 된 것이다. 왕실의 시책에 대한 반발이 강해지는 분위기 속에서 그대로 선거인단 집회가 파리의 키를 잡는 꼴이 되어 있었다.
"요컨대 비공식 자치단(코뮌)이라는 거야."
"그렇다 해도 선거인들의 모임인 것은 변함이 없잖습니까. 선거인이라면 훌륭한 부르주아입니다. 유산계급인 이상, 서민만큼 생활이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신분에 상응하는 교육을 받은 유식계급이죠. 그런 사람들이 귀족의 음모니 뭐니 하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논하다니......"

p22
"하지만 백작님, 지금 샹드마르스에 모이고 있는 것은 오로지 독일 병사와 스위스 병사입니다. 프랑스인으로서의 동포 의식 따위는 없습니다. 단순히 돈으로 고용된 용병일 뿐이죠."
"그렇다면 더욱 그렇지, 로베스피에르."
"뭐가 더욱 그렇다는 겁니까?"
"잊었나? 왕이 전국삼부회를 소집한 이유를."
"그건 적자 재정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고......"
로베스피에르는 말을 삼켰다. 그렇게 생긴 공백에 미라보는 대답을 던져주었다.
"알았나? 단순히 돈으로 고용된 병사들이라면, 뭐가 좋아서 돈도 없는 폐하를 위해 싸워야 하지?"

p26
민중의 힘은 확실히 엄청나다. 하지만 쉽게 뜨거워지는 반면 식기도 쉽고, 지극히 사소한 이유로 열광하는 주제 조금만 변화를 주면 생사가 걸릴 만큼 큰 문제도 간단히 잊어버린다. 이런 사리를 근거로 미라보는 이렇게 결말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p27
로베스피에르는 구원받은 표정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과연 그렇군요. 지금 파리는 폭발 직전의 상태니까요. 때마침 흉작으로 식량 부족 사태가 초래되고, 울분이 쌓이고 있을 때 군대까지 동원되어 더욱 초조감이 높아진다. 귀족의 음모니 뭐니 하는 것은 망상의 산물이라 해도, 노골적인 적개심도 품게 된다.

 p31
 "그러니까 이 기회를 헛되이 버내면 안돼. 기회를 살리려면 부자와 가난한 자를 하나로 묶을 고리를 준비해야 돼. 그 고리가 될 수 있는 인간이야말로 폭동을 선도할 적임자야."

p38
"나이는 젊어도 마음이 늙었다면, 그것도 말할 거리가 안되니까."
책을 너무 많이 읽은 지식인의 속성이랄까. 미라보가 보기에 팔레-루아얄에 모이는 사람들은 격렬한 논쟁만 벌일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 같았다. 경우에 따라서는 논쟁을 위한 논쟁일 뿐이다. 대부분의 논쟁은 결국 탁상공론에 빠지는 것이 고장이다. 아니, 논쟁의 질에 관해서 말한다면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는 것이 미라보의 솔직한 기분이었다. 알맹이 없는 공론이든 난폭한 폭록이든 간에, 논리에 모슨이 있다 해도 그런 것은 전혀 상관없아.
"그냥 의연하게 일어서주기만 한다면......"

p41
실제로 싸움에 진 개라는 것은 결코 수치가 아니었다. 특히 팔레-루아얄에서는 오히려 자랑거리가 된다고 해도 좋았다. 카페에 자리를 차지한 채 엉덩이를 들려고도 하지 않는 자들을 무시하고, 적어도 행동을 취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승부가 나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겁쟁이들의 무리는 그것 하나만으로도 경멸해버릴 수 있다.

p54
"예, 그렇습니다. 백작. 나는 뤼실과 결혼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적지금한 것이 아닙니다. 정정당당하게 청혼도 했습니다. 다만 거절당해버렸지요. 뤼실이 아니라 아버님한테요. 딸의 결혼 상대로 보잘것없는 변호사는......"
"그럼 영웅이 되게."
딱 하는 소리는 묵직했다. 나쁘지 않은 연출이었다. 미라보가 말과 함께 품에서 꺼내 탁자 위에 놓은 것은 총이었다.
"그렇다면 무기를 들게. 맨 몸으로는 뤼실의 아버지한테도 이길 수 없지."
데물랭은 다시 할 말을 잃었다. 곤혹스러운 표정을 향해 미라보는 밑바닥 쪽에서 울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자, 이 총을 주지. 하늘을 향해 한 발만 쏘면 팔레-루아얄 전체가 주목할 거야. 조용해졌을 때 큰 소리로 외치면, 분노를 쏟아내는 자네의 연설이야말로 영감이 되어 모든 사람의 가슴에 깊이 스며들겠지.
"말이라면 꽉꽉 차 있을거야. 머릿속에."

p57
미라보는 놀라움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야비한 풍모는 마치 짐승 같다. 말을 토해낼 때마다 이를 드러내고 마치 고깃덩어리를 물고 늘어지는 것 같지 않은가. 열등감, 굴욕, 초조, 그리고 감추고 있던 자부심, 가슴속 깊이 쌓여 있던 모든 감정을 이때라는 듯이 단숨에 폭발시키면서, 쭈뼛거리고 있던 카미유 데물랭과 저 사람이 동일이란 말인가."

p84
데물랭은 생각했다. 자기가 싸움을 즐길 수 있는 인간이라고는 어제까지만 해도 생각지 않았다. 군대의 집결에 분노할 만큼, 폭력은 어리석고 비열한 짓이라고 경멸했다. 지금도 폭력 자체는 좋게 생각지 않지만, 그렇다 해도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행동하고 결국 적을 물리치는 행위가 주는 일종의 쾌감까지는 부정할 수 없었다.

p88
데물랭은 물에 뛰어드는 듯한 동작으로 다시 땅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입이 지금지금 모래를 씹게 된 것은 이가 딱딱 마주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p172
"많은 부를 자랑하는 부르주아에서부터 동전 한 닢 갖지 못한 실업자에 이르기까지......"
같은 목표를 바라보며, 이제 제 3신분은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
기적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면서 데물랭은, 그렇기 때문에 눈에 힘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이야말로 눈을 돌리면 안돼. 저곳에 내가 죽음을 선언해야 할 적이 있어. 그 적의 이름은 바스티유, 또 다른 이름은 구체제라고 하지.

p192
"아아, 파리는 해주었어."
바스티유에서 거둔 성과가 훌륭하다는 것은, 바스티유가 기껏해야 요새 하나에 불과하다 해도 충분한 압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인민은 승리했다. 불가능하게 여겨졌던 승리를 쟁취함으로써 파리가 세계에 준 충격은 헤아릴 수 없다. 전체의 형세를 좌우할 정도의 승리는 아니라 해도, 그 심리적 효과만은 엄청난 것이다.

p200
루이 16세가 열쇠를 받자, 이때부터 시내 행진이 시작되었다. 말을 탄 라파예트 후작이 선도하여, 떠들썩한 행렬은 그레브 광장으로 향했다. 거기서 다시 바이이가 왕에게 건네준 것은 이번에는 붉은색과 흰색과 푸른색의 세 가지 색으로 장식된 모표였다.
붉은색과 푸른색은 파리의 전통적인 상징색이다. 7월 14일에는 파리 총궐기의 표지로도 사용되었다. 라파예트의 발안으로 흰색이 새로 추가된 것이, 흰색이 전통적으로 프랑스 왕가의 상징색이기 때문이다.

p224
어쨌든 봉건제 폐지라는 말은 대단한 신통력을 발휘했다. 프랑스 전역의 소요는 서서히 진정되는 방향으로 돌아섰다. 이렇게 평온을 되찾고 있던 8월 26일, 의회가 날마다 초안을 심의한 끝에 내놓은 것이 [인간과 심니에 권리에 관한 선언], 즉 [인권선언]이었다.

<전문, 국민의회를 구성하고 있는 프랑스 인민의 대표들은 인간의 권리에 관한 무지, 망각 또는 경시가 공공의 불행 및 정부부패의 유일한 원인이라는 것에 유의하면서, 인간에게 자연적이고 양보할 수 없으며 신성한 제 권리를 하나의 엄숙한 선언에서 표명하기로 결의했다.>

<그것이 의도하는 바는, 사회체의 모든 구성원에게 이 선언을 통하여 부단히 그들의 권리와 의무를 끊임없이 상기시키기 위해서이고, 입법권과 행정권의 행사에 있어서도 정치제도가 본래 지향해야 할 바와 항상 비교할 수 있도록 해둠으로써 그것을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좀더 감복할 수 있는 높이로 승화시키기 위해서이고, 끝이로 또 하나는, 시민이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이상, 간결하고 이론의 여지가 없는 이 모든 원리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그것을 항시 헌법 유지와 만인의 행복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제1조, 인간은 자유롭게, 그리고 권리에서 평등하게 태어났다. 사회적 차별은 오직 공공의 이익과 관련될 때에만 가능하다.>

<제2조, 모든 정치적 결사의 목적은 인간의 자연적이고 불멸적인 권리들을 보존하는 데 있다. 이 권리들은 자유, 소유, 안전, 그리고 압제에 대한 저항이다.>

<제3조, 모든 주권의 원리는 본질적으로 국민에게 있다. 어떤 단체도, 어떤 개인도, 명백하게 국민에게 근거를 두지 않은 권력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4조, 자유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무엇을 해도 좋다는 뜻이다. 각자가 인간의 자연권을 행사할 때에는 사회의 다른 구성원에게도 같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마련된 약간의 범위에 의해서만 제약을 받는다. 그 범위는 법률에 의해서만 정할 수 있다.>

<제5조, 법률은 사회에 해로운 행위들에 대해서만 금지할 수 있다. 법률로 금지되지 않은 모든 행위는 방해될 수 없으며, 또한 누구에게도 법률이 명령하지 않는 것을 하도록 강제할 수 없다.>

<제6조, 법률은 일반의지의 표현이다. 모든 시민은 직접, 또는 그들의 대표를  통해 법률의 형성에 참여할 권리를 갖는다. 법률은 보호의 손을 내미는 경우든 처벌의 손을 뻗는 경우든, 모든 상대에게 평등해야 한다. 모든 시민은 법 앞에 평등하므로, 그 능력에 따라서 그리고 덕성과 재능 이외에는 어떠한 차별도 없이 평등하게 공적인 자리와 지위와 직책에 앉을 수 있다.>

<제7조, 법률에 규정된 경우가 아니거나 법률에 규정된 형식에 의하지 않고는 누구도 소추되거나 체포되거나 구금되지 않느다. 자의적인 명령을 요청, 발령, 집행하거나 또는 집행케 하는 자는 처벌받아야 한다. 한편 시민이라면 법률에 의거하여 소환되거나 체포된 경우에는 신속히 이에 따라야 한다. 거기에 저항하면 죄가 된다.>

<제8조, 법률은 엄격하고 명백하게 필요한 형벌만을 규정해야 하며, 또한 범법 행위 이전에 제정, 공포되고 또 합법적으로 적용된 볍률에 의하지 않고는 누구도 처벌받지 않는다.>

<제9조, 모든 사람은 유죄로 선고되기까지는 무죄로 추정되므로, 체포해야 한다고 판단된 경우에도 그의 신병을 확보하는 데 필요하지 않은 가혹한 행위는 법률에 의해 엄격히 억제되어야 한다.>

<제10조, 자신의 의사 표명이 법률에 따라 확립된 공공질서를 어지럽히지 아는 한, 설령 그것이 종교에 관한 것일지라도, 누구도 자신의 의견 때문에 박해를 당해서는 안 된다.>

<제11조, 사상과 의견의 자유로운 소통은 인간의 가장 고귀한 권리의 하나다. 따라서 시민은 누구나 자유롭게 말하고 쓰고 출판할 수 있다. 다만 법률에 규정된 경우에는 그 자유의 남용에 책임을 져야 한다.>

<제12조, 인간과 시민의 권ㄹ리를 보호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공적인 무력이 필요하다. 이 무력은 만인의 이익을 위해 설치되는 것이고, 그 무력을 위탁받은 자들의 개별적인 이익을 위해 설치되는 것은 아니다.>

<제13조, 공적 무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나 행정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는 공동으로 세금을 부담하는 것이 불가결하다. 세금은 경제력에 따라 모든 시민에게 동등하게 할당되어야 한다.>


<제14조, 모든 시민은 스스로 또는 그들의 대표를 통해 공적 세금 부담의 필요성을 확인하고, 자신의 의지로 동의하고, 그 용도를 추적하고, 부담액과 과세 방법, 징세 방법 및 시행 기간을 결정할 권리를 가진다.>

<제15조, 사회는 모든 공직자에게 그들의 행정에 대한 보고를 요구할 권리를 가진다.>

<제16조, 권리의 보장이 확보되어 있지 않고 권력의 분립이 확립되어 있지 않은 사회는 헌법을 갖고 있지 않은 것과 같다.>

<제17조, 소유권은 신성한 불가침의 권리이므로, 합법적으로 확인된 공적 필요성이 명백히 요구하는 경우가 아니고는, 그리고 정당한 액수의 사전 보상의 조건이 충족되지 않고는 누구도 그 소유권을 빼앗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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