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노인(壽老人)>, 김명국, 1643년경, 종이에 먹, 간송미술관

 

 

[참고자료]


■ [그림읽기] 찰나의 붓질, 영원한 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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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 김구의 <백범일지> 중에서 

 

문화는 복합적인 요소들이 만들어내는 사회 전반에 흐르는 말없는 힘이다.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으며 누군가 만들고 누군가 지켜내고 누군가 다시 배우며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오늘은 우리의 조상들이 만들고 지켜왔던 문화유산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 보려 한다.우선, 우리가 잘 알고 있고 방송이나 교과서에도 자주 등장하는 낯익은 문화유산을 몇 점 소개한다.

 

 

 

▲<단오풍정>,《혜원 전신첩》, 간송미술관 소장, 28.2cm x 35.6cm, 국보 135호

 

▲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미술관 소장, 국보 70호, 23.3 x 16.6cm(반곽)



 

 ▲ 청자상감운학문매병, 간송미술관 소장, 국보 68호

 

 

현재 모두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우리의 대표적인 문화유산들이다. 하지만 어떤 한 사람이 없었다면 아마 이 유산들은 일제강점기의 다른 수많은 문화유산처럼 해외로 밀반출되고 전쟁 속에서 없어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오늘은 위의 문화재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우리의 문화재들을 지켜온 간송 전형필 선생과 그의 문화재 수집이야기를 해 본다.

 

간송 전형필(1906~1962)과 간송미술관

 

1906년에 태어난 전형필은 24살의 어린 나이에 논 800만평(4만 마지기)를 상속받았다. 현재 가격으로 환산하면 6,000억원 정도이고 그 땅에서 수확하던 곡식이 1년에 400억원이 넘는 막대한 재산이었다.
그는 그 재산으로 무엇을 할까 고민을 하였다. 그러던 중에 추사 김정희의 제자 오경석의 아들인 오세창을 만났다. 그는 전형필에게 '산골짜기 흐르는 맑은 물과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라는 뜻의 '간송'이라는 아호를 붙여준다. 간송은 해외로 밀반출되고 있는 우리의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 그의 전 재산과 삶을 바친다. 후에는 그동한 수집한 유산들을 지키기위해 대한민국 최초의 사립미술관인 '보화각'을 짓는다. 그런 그는 1962년 57세의 이른 나이에 수많은 문화유산을 남긴 채 아쉬운 삶을 정리한다.'보화각'은 후에 '간송미술관'이 되고 간송의 유지에 따라 매년 봄, 가을 두 번 전시관을 무료로 공개하고 있다. 간송미술관은 현재 12점의 국보와 10점으 보물 그리고 서울시 유형문화재 4점 등 고서화를 많이 소장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미술관이다.

 



 

간송의 문화유산 수집이야기

 

간송은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우리의 문화유산을 수집하고 지켜왔기에 그가 수집한 문화재들에는 하나같이 사연들이 가득하다. 그 중 인상적인 두 장면을 소개한다.

 

첫번째 장면은 간송이 1936년 영국인 변호사 존 개스비로부터 고려청자를 구매하는 모습이다.간송은 개스비를 그가 짓는 보화각으로 데려와서 설득한다.

"개스비선생, 나는 귀하가 그동안 힘들여 수집한 고려청자를 이곳에 전시하면서, 조선에도 이런 찬란한 문화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 동포들에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곳으로 모시고 온 겁니다.

 

"전 선생, 이곳에 와서 보니 전 선생이 단순한 수집욕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조상들이 만든 청자에 대한 자부심으로 다시 찾아오려 한다는 사실이 느껴집니다. 그것도 아주 가슴 깊이...... 저는 조국의 대영박물관에 돈을 받고 팔려고 했는데, 전 선생은 자신의 돈으로 구입해서 직접 지은 박물관에 진열하겠다니 머리가 숙여집니다. 전 선생, 제가 40만원에 양보하겠습니다.

 

 


40만원이라 하면 당시 서울의 기와집 400채 값으로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약 1200억원으로 도자기 한 점당 약 60억에 구입한 것이었다. 실로 대단한 결정이었으며, 하마터면 대영박물관의 소장품이 될 수 있었던 아찔한 장면이었다.

 

두번째 장면은 한글의 창제 목적과 원리를 밝힌 <훈민정음 해례본> 수집 때의 모습이다.간송은 항상 <훈민정음>에 대해 주의를 집중하다 마르크스주의 국문학자인 김태준을 매개로 해서 <훈민정음>을 거래하게 되었다. 당시 전형필은 김태준에게 묻는다

"소유주가 얼마를 말씀하셨소""천원을 말했습니다.""<훈민정음> 값으로는 만 원을 쳤습니다. <훈민정음> 같은 보물은 적어도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해요."

 

 

 


간송은 이에 더불어 소개비 명목으로 김태준에게 별도로 천원을 준다. 총 만천원이다. 지금 금액으로는 약 35억원정도이다. 간송은 물건을 무조건 싸게 사려는 장사꾼이 아니었다. 가치를 잘 모르는 사람과 거래를 할 때도 충분한 가격을 주고 구매를 했다.

 


<훈민정음>은 구매 후에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일제치하의 시대적 상황 때문에 세상에 알려지면 안되었었다. 하지만 광복 후에는 무엇보다 소중한 보물이 될 것이었다. 외부적으로 자신이 알려지지 않기 위해 거래를 대리인을 통해 하면서 주의를 기울였다. 한국 전쟁 당시에는 피난을 갈 때도 품속에 품었고, 잘 때는 베개 속에 넣고 지켰다.

 

 


<간송 전형필>을 읽으면서 많이 놀랐다. 그의 막대한 재산에 놀랐고, 모든 재산을 오직 해외반출을 막기 위해서 문화재수집에 몰두한 그의 헌신에 감탄했고, 마지막으로 왜 이런 분을 지금까지 몰랐을까? 하는 나의 무지와 세상의 무관심에 아쉬움이 남았다. 우리는 그저 그들이 지켜낸 유산에 대해서 한 번 더 보고, 읽고, 찾아보고, 느껴보는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우리의 도리이자 김구 선생이 말하는 문화보국으로 가는 한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우리 문화재와 미학에 대해 한 발자국 더~


■ 우리 문화재 그리고 미학 - http://zorbanoverman.tistory.com/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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