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가 두 명이다. 그런데 조합이 평범하지 않다. 한 명은 경영자이고, 다른 한 명은 시인이란다. 낯선 조합이다.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책의 부제는 '우리가 놓치고 있던 가장 쉬운 창조법'이다. 더불어 '위대한 창조의 시작,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 를 덧붙인다.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 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 비밀을 파헤치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시인들의 눈은 조금 다르다. 그들은 직접 어떤 물체가 되어 본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들여다보기도 한다. 그들은 세상에 보이는 것만 보지 않는다. 똑같은 것을 보아도 같지 않다.

강신장, 황인원의 『감성의 끝에 서라』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위한 손쉬운 방법론을 제시한다. 바로 오감법, 오관법, 오연법, 오역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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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은 소중하고 필요한 것이지만 맹목적인 노력만이 가치의 척도는 아니다. 무엇을 위해 노력하는지 성찰이 먼저 필요하고, 노력이 정당하게 보상받지 못하는 구조에 대한 분노도 필요하다. 가장 위험하고도 어리석은 건 '노력해야 성공한다'를 넘어서 '성공한 이들은 다 처절하게 노력했기에 그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만큼 노력하여 성공한 이들이니까 괴팍하고 못되게 굴 만하다', '강한 것이 아름답다' 등으로 끊임없이 가지를 치는 스톡홀름증후군이다. 스티브 잡스가 매혹적이라 하여 그의 괴팍함과 못된 점조차 찬양할 필요는 없다. 훌륭한 점과 비판받아야 할 점은 냉정하게 분리해 평가해야 한다. 그리고 대체로 성공에는 재능과 노력이 필요한 건 사실이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실사회에는 그저 우연히 부모 잘 만나서 과분한 기회를 누리며 사는 이들도 많다.


'성공한 이들은 다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는 착각에 빠진 대중은 벌거벗은 임금님 앞에 무릎을 꿇고 모욕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조지 오웰의 『1984』에서 인구의 2퍼센트에 불과한 지배계급인 영사(영국 사회주의) 내부 당원들이 13퍼센트의 실무자 중간계급을 동원하여 85퍼센트의 노동자 계급을 사육하는 동물처럼 지성적인 사고의 싹을 잘라내며 온갖 선전선동과 공포의 조작으로 통치하듯 말이다.`


- 문유석, 『개인주의자 선언』 中



우리는 어쩌면 지금도 문제는 '노력'이 부족해서 라고 생각합니다. 문제가 '노력' 부족이면 당연히 답은 '노력'을 더 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또 다시 노력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그래도 부족하답니다. 결국 또 다시'노력' 부족입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살다 보니까, 나이를 먹어보니까, 사회에 찌들어 보니까 그런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분명 나보다 노력하는 것 같지 않은데 누군가는 잘 되는 거 같습니다. 태어날 때 부터 부의 차이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평등하다고 하지만, 결국 기회는 평등하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자식들은 추운 겨울 휴전선을 앞에 두고 손발을 비벼가며 근무를 서고, 누군가는 코너링이 좋다는 이유로 경찰 고위직의 운전병이 됩니다. 이유를 가져다 붙여도 그런 걸 가져다 붙이니 더 화가 납니다. 멍청한 놈이 저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니 화가 복 받쳐 오르기도 합니다. 누군가의 성적표는 말 그대로 양가집안입니다. 양과 가가 수두룩 합니다. 그런데 자기 능력으로 대학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당시 입학을 맡았던 이들은 청문회 자리에서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의 국정청문회 대답이 서로 다릅니다. 누군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이 대학을 이끌고 있습니다. 화가 납니다. 너무나 화가 나네요.


2016년 사람들이 스스로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섰습니다. 사람들도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 권력이 있는 사람들이 나름 힘을 발휘해서 서로 이권을 주고 받는 것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예상은 해왔으니까요. 그런데 하나씩 들어나는 전황들을 살펴보니 지금 당신들이 하루하루 노력하면서 살아가는 나름 의미있게 살아가는 자신들의 삶에 너무나 큰 회의감이 몰려왔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힘든 하루를 보내도 그래도 내일은 더 나아지겠지 하는 희망만으로 하루하루 더 노력하는 삶을 살아온 사람들은 너무나 크게 가슴이 저려왔습니다. 아니 분노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많은 것이 변하지는 않을 것 입니다. 그래도 저 같은 사람이 하루하루 노력하는 삶을 살게 하는 동력마저 잃게 만들지 않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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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잡지 <리더스 다이제스트>는

1931년 발표된 헬렌 켈러의 수필

『사흘만 볼 수 있다면 Three days to see』을

20세기 최고의 수필로 선정했습니다.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저는

단지 감촉을 통해서도 나를 흥미롭게 해주는 

수많은 것들을 발견합니다.


저는 잎사귀 하나에서도 정교한 대칭미를 느낍니다.

저는손으로 은빛 자작나무의 부드러운 표피를

사랑스러운 듯 어루만지기도 하고

소나무의 거칠고 울퉁불퉁한 나무껍질을 쓰다듬기도 합니다.


봄이 되면 긴 겨울잠을 깨고 나오는 자연의 첫 번째 몸짓인 

새싹과 새순을 찾아보려는 희망으로 

저는 나무줄기들을 더듬어봅니다.


(......)


제게 있어서 계절이라는 꽃수레는

너무나 떨리는 끝이 없는 드라마이며

그 활기찬 흐름은 저의 손가락 끝을 스치며 지나갑니다.


때때로 이런 모든 것들을 너무나도 보고 싶은 열망에

제 가슴은 터질 것만 같습니다.


단지 감촉을 통해서만도 이처럼 많은 기쁨을 얻을 수 있는데,

만약에 볼 수만 있다면 얼마나 더 많은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 『감성의 끝에 서라』 中 -


헬렌 켈러는 내가 만약 대학교의 총장이 된다면, "전공 불문하고 모든 학생들이 반드시 들어야 할 필수 과목을 하나 만들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당신의 눈을 잘 쓰는 법 How to use your eyes' 입니다. 헬렌 그녀는 생후 19개월 무렵 병으로 시각과 청각을 모두 잃었습니다. 그녀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방법은 만지는 것, 바로 촉각 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감촉만으로 많은 기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보는 것이 허락되었다면 어떠했을까요? 아마도 지금 저에게 허락된 시각과는 전혀 다르게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행복과 축복을 너무나 쉽게 일상화 시켜 버립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무엇인가를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기 마련입니다. 새로움만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으니까요. 이제는 당연함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합니다. 수많은 책들에서 '익숙한 것에서 낯설음을 경험하라' 고 합니다. 어쩌면 식상하다는 느낌마저 듭니다.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세상이, 자신의 삶이 변하게 되는 것은 어떤 특별함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식상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행동으로 옮기고 삶의 문 안쪽으로 들이는 순간이 바로 세상과 자신의 삶이 변하게 만듭니다.


다시 바라보겠습니다. 다시 생각해보겠습니다. 제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 있는지를, 그것이 지금 제가 놓치고 있는 것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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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고의 공부 No, 나만의 공부 Yes 


나는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을 잘 하지 못하는 편이다. 그런데 '책'에 대해서 몇 가지 생각나는 것들이 있다.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어린이들이 읽는 위인전 중에 내가 가장 많이 읽은 책은 '한석봉' 이었다. 아직도 얼핏 기억나는게 한석봉이 마른 바위를 종이 삼아, 시냇물의 물을 먹으로 삼아 글을 쓰고, 땅 위에 나뭇가지로 글을 쓰는 그림들이 생각나는 듯 하다. 그리고 제목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여러 분야를 만화로 설명해주던 전집이 있었다. 중학교 때는 돈이 조금씩 생길때 마다 당시 조금 거리가 있었던 서점으로 달려가 한 권 한 권 모은 책이 있었다. 지금도 이 책은 사람들에게 빌려주고 나면 꼭 다시 찾아오는 책이다. 어렸을 때의 그 기억에 꼭 간직하고 싶은 책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문열의 '삼국지' 다. 


생각해보니 어렸을 때 부터 책을 좋아하긴 했었던 거 같다. 그 재미는 한참 동안 끊어져 있었다. 하지만 아쉬우면서도 다행스럽게 서른 살이 되던 해에 끊어진 끈을 다시 엮을 수 있었다. 갑작스럽게 책의 맛을 알게 되었고, <아라비안 나이트> 페르시아의 왕 샤리아르가 세헤라자드의 이야기에 빠져들어 하루 하루를 지내듯이 소설 속의 이야기 속에 흠뻑 젖어들곤 했다. 출퇴근 버스에서 "독서등 좀 켜 주세요!' 라고 말을 하기도 하고, 휴대용 독서등도 사기도 했다. 마지막 남은 몇 장이 너무 궁금해서 화장실에서 나머지를 읽고 회사로 들어가기도 했다. 어떤 책은 버스에서 내려서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손에 잡고 있기도 했다. 그렇게 5년이라는 시간이 나에게 지나왔다. 그리고 많은 것이 바뀌었다. 이제는 재미를 위해 읽었던 책에서 나름의 열매를 맺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피상적인 것을 바라보았던 그 동안과는 다른 새로운 방법을 원했다. 그리고 그것이 내 삶의 공부가 되기를 바래 본다.



얼마 전에 한 일 년 정도 책장에 묵혀두었던 켄 베인의 『최고의 공부』를 읽었다. 그리고 나서 '앞으로 내 삶을 위한 '최고의 공부'를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고, 노트 위에 '최고의 공부'라고 적고 내가 생각하는 '공부', 앞으로 어떻게 책을 읽어나갈지를 생각해보았다.

'인성함양', '재미있게', '통합적으로', '연결,융합,확장', '다양하게', '체계적,계획적,방법론적', '성과있게' 라는 말들이 떠올랐고 선으로 연결해 둔다.

'앞으로 어떻게 공부를 할까?' 이 말은 곧 '어떻게 살아갈까?'로 이어진다. 지금까지의 생각을 정리해 본다. 


첫번째는 무엇보다도 '재미'다. '평양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다' 라고 하지 않던가.

내가 좋아하는 것부터 시작하자. 내가 좋아하는 목록들을 하나씩 적어두고 거기서 부터 시작하자. 그리고 내가 흥미가 떨어졌을 때 스스로 동기부여를 할 수 있는 방법을 하나씩 찾아볼 필요가 있다. 

최근에 아침마다 듣는 음악이 있다.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이다. 그런데 나는 클래식에 대해서 문외한이다. 예전에 박웅현의 『여덟 단어』를 통해 알고 처음으로 들었는데 다른 음악들이 아무리 좋아도 어느 정도 반복해서 들으면 지겨워지는데 이 곡은 들을 때 마다 감동이고 조금 더 자세히 듣고 싶어서 눈을 감게 된다. 그런데 나는 어떤 소리가 어떤 악기에서 나오는지, 각 악장의 의미, 구성 정보같은 것들은 하나도 모른다. 단지 소리가 좋아서 듣는다. 이런데서 부터 파생해야 할 거다. 차이코프스키에 대해서 알아보고, 그가 살던 러시아에 대해서도 알아보고, 협주곡은 무엇인지, 이 음악이 말하고자 하는 건 무엇일까 라던지 부터 하나씩 알아갈 생각이다. 그렇게 시작해볼 생각이다.


두번째는 '인성함양' 이다. 모든 것의 기본은 인성으로 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을 생각할 줄 아는 마음과 배려할 줄 아는 마음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 항상 부족하지도, 과하지도 않게 '중용'을 지키는 삶을 살아가고 싶은 생각이 있다. 하지만 '중용'을 회색분자로 잘 못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나만의 의지는 분명히 반영되어야 한다. 부드럽지만 강인하게, 매섭지만 아프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세번째는 '다양하게 연결, 융합, 확장' 이다. 지금까지는 주로 책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정보를 얻어 왔고 재미를 찾았다. 그런데 이제는 조금 더 그 매개를 넓혀서 오감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음악을 듣고 기사를 찾고 다큐멘터리도 보고, 마음에 드는 영화감독을 찾으면 그 감독의 전작을 탐해 보기도 하자. 장르에 상관없이 매체에 상관없이 다가가고, 경험하자. 그리고 하나씩 내가 좋아하는 음악들, 좋아하는 영화들의 목록들을 쌓아가자. 그렇게 하나씩 다른 분야에도 매니아가 되는 거다. 나중에는 내가 서평이 아닌 음악평과 영화감상평을 쓰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


네번째는 '통합적으로' 다. 세번째와 맥을 같이 한다. 어떻게 보면 내가 생각하는 공부의 궁극의 목표이기도 하다. 통합적으로 공부해서 통찰력을 얻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공부이다. 조선후기 박지원의 <허생전>에 보면 집 안에서 10년 공부를 목표로 글만 읽던 허생이 가난에 찌들고, 아내의 등살에 밀려 세상에 나온다. 그리고 장안의 한 부자를 찾아가 돈을 빌려 그 밑천으로 장사를 해서 큰 부자가 된다. 허생이 누가 보면 배포있는 장사꾼 기질이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통찰력을 얻었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통찰력을 얻을 수 있고, 어떻게 하면 통합적으로 공부할 수 있을까?


책을 읽더라도, 무엇을 하더라도 단편적으로 지나가서는 안 된다. 궁금한 단어가 있으면 찾아보고, 모르는 내용이 있으면 연계되는 것들을 찾아보자. 항상 '왜?'라는 의문을 가지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가 하는 말이 타당한가?', '내 생각은 어떤가?' 와 같은 질문을 품으면서 비판적인 자세를 열어두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하나의 주제에 대한 파장이 생겨나고, 다른 주제를 공부하게 되면 또 다시 다른 파장이 생기게 될 것이다. 그 두 파장이 만나게 되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때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다섯번째는 '체계적, 계획적, 방법론적' 이다. 내가 어떤 공부를 통해서 얻은 것이 있을 때 그것을 시간이 지나고 다시 나에게 상기시켜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내야 한다. 더불어 누군가에게 알려주고 싶을 때 듣는 이에게 조금이라도 쉽고 효과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 있어야 한다. 여기에는 분명 '감동, 재미, 지식' 중에 하나는 포함되어 있어야함은 물론이다. 이를 위해서는 내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일종의 Tool 이나 방법론을 스스로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책을 읽어보면서 접한 '심리테스트' 혹은 '개인 역량 강화'를 위한 계획표 같은 것도 상관없다. 이런 것들을 하나씩 모아 보고, 나에게 맞는 것을 스스로 만들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든 활용가능하게 관리, 보관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여섯번째는 '성과있게' 다. 스스로를 위한 공부든, 회사 업무를 위한 공부든 어떤 가시적인 보상이 있어야 더 재미를 느끼게 된다. '보상'에 얽매여서는 안되지만, 사람의 특성 상 어쩔 수 없이 중요한 부분이다. 페이스북에 사진을 올려두고 늘어나는 '좋아요'를 바라보며 무흣하게 바라보는 것과 같은 심리일 것이다. 블로그에 적어두고 사람들이 읽어주는 재미가 그 보상이 될 수도 있다. '개인 책 출판', '업무에 관련된 자격 취득' 과 같은 구체적인 목표를 이루어나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되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중간 중간에 스스로 보상받을 수 있는 작은 성과들을 배치하고 그것을 하나씩 하나씩 각개격파하면서 만족감을 얻어야 한다. 


이 방법들이 '최고의 공부'를 위한 방법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씩 켜켜이 쌓아나가고, 내 몸에 맞는 방법들을 하나씩 찾아보자. 그러다 보면 최고의 공부는 되지 못하더라도 나에게 맞는 공부를 찾아갈 수 있지 않을까 자문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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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고력의 사다리 ▶ 



퍼트리샤와 캐런의 사다리에서 최하층에 있는 사람들은 지식이란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그것을 관찰하기만 하면 된다. 아이는 할머니에게 "할머니가 죽으면, 나한테 전화해서 어떤지 알려 주세요." 라고 말한다. 대학생은 "내 눈으로 본 게 진실이야. 토 달지 마"라고 절대적인 확신에 차서 말한다. 이런 식의 사고에서는 추상 개념 같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주로 아이들이 많이 사용하는 방식이다.


두 번째 단계에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알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마땅한 사람에게 물어보기만 하면 된다고 믿는다. 문제를 충분히 생각하기보다는 권위자의 지식에 의존한다. 그 권위자들이 어떻게, 어디서 그런 지식을 얻었는지는 묻지 않는다. 음식이 슈퍼마켓에서 생산된다고 말하는 도시 아이들처럼, 그들은 어떤 사실이나 개념 뒤에 숨어 있는 힘을 보지 못한다. "인터넷에서 봤으니까 사실이야"라고 우리가 흔히 하는 말도 이런 방식의 사고를 보여 준다.


세 번째 단계에서, 사람들은 역시 권위자에게 의지하지만 그 권위자의 한계를 인지한다.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문제는 자기 자신의 믿음으로 채우면 된다고 생각한다. 한 학생은 퍼트리샤와 캐런에게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증거가 있다면 그건 지식이 되겠죠. 그 전까지는 그냥 추측에 불과해요."


지금까지의 세 단계에는 공통점이 있다. 퍼트리샤와 캐런은 그것은 '전(前) 반성적 사고'라고 부른다. 이들 단계에서 사람들은 지식이 권위자에게서 나온다고 믿는다. 선생님이나 할머니가 진실이라고 말해주는 것, 또는 내 눈으로 직접 본 것만이 진실인 것이다. 그것만 기억하면 학습은 끝난다. 거기에 어떤 의문도 의혹도 품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그대로가 진실이다.


네 번째 단계에 이르면, 사람들은 어젯밤에 내가 만났던 택시 기사처럼 생각한다.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는 모퉁이를 돌면서 이렇게 말을 꺼냈다. "자기가 그걸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죠. 똑같은 증거 하나를 두고도 사람마다 보는 방식이 다르니까요." 퍼트리샤와 캐런에게 한 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진화론이 확실히 증명된다면 더 믿음이 갈 거예요. 피라미드처럼, 그 진실이 영원히 밝혀지지 못할 것 같아요. 물어볼 사람이 없잖아요. 그때 살았던 사람이 없으니까요." 택시 기사나 학생은 지식이란 불확실하고 사람마다 자신만의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증거와 타당한 이유를 대면 무엇이든 정당화할 수 있지만, 어떤 증거를 택하느냐는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려 있다. 이 단계의 학생들은 자신의 확고한 믿음을 뒷받침해 줄 이유와 증거만 찾을 것이다. 비판적 사고에 대해 연구한 철학자 리처드 폴은 이런 종류의 추론을 '약한 의미의 비판적 사고'라고 부른다.


다섯 번째 단계에 올라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지만, 거기까지 다다른 이들은 모든 것을 증거에 대한 해석으로 본다. 우리는 그 해석들을 알 수는 있어도 판단할 수는 없다. 철학자마다 다른 식으로 풀이할 것이다. 한 학생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 가지 해석을 읽어봤어요. 교수님은 제게 그것들을 평가하라고 하시지만, 어느 게 더 낫고 더 못한지 어떻게 알겠어요? 너무 혼란스러워요." 퍼트리샤와 캐런은 한 학생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그래서 문제를 공략하는 방법도 서로 달라요.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내 의견이 똑같이 진실일 수도 있겠지만, 서로 다른 증거에 근거하고 있죠." 인 단계의 학생들은 수많은 해석이 존재할 수 있음을 알지만, 쉽게 어떤 결론에 이르지 못한다. 


네 번째와 다섯 번째 단계 역시 공통점이 있다. 퍼트리샤와 캐런이 명명한 '유사 반성적 사고' 단계에서는 증거가 중요하지만, 그 증거를 어떻게 사용해 결론을 이끌어 내느냐는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 이 단계의 학생들은 뒤죽박죽 섞여 있는 해석들을 볼 줄 알고 그 각각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지만, 그것들을 서로 비교하지는 못한다. 퍼트리샤와 캐런은 이렇게 썼다. "그들은 증거를 이용하지만, 증거가 결론을 도출해 내는 방식을 모르기 때문에 판단을 개인 특유의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더더욱 오르기 힘든 것이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단계, 즉 퍼트리샤와 캐런이 말한 '반성적 사고' 단계다. 이 경지에 오른 사람들은 지독히도 복잡하고 성가신 문제를 만났을 때 여러 시각에서 증거를 평가하고 거기서 비롯되는 해석들과 아이디어들을 찾는다. 여러 관점과 다양한 맥락에서 증거와 의견들을 서로 비교한다. 복잡한 문제에 대한 잠정적 해결책을 찾기 위해 증거의 타당성을 재면서 동시에 이렇게 묻는다. "이 시점에서 결론을 이끌어 내는 데 이 증거는 얼마나 유용할까? 꼭 결론을 내야 할까, 아니면 불확실한 이 상황을 그냥 감내해야 할까? 잠정적 해결책이 문제를 조금이나마 풀어 줄까, 아니면 오히려 더 많은 의문을 불러일으킬까?" 한 학생은 두 연구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확신하긴 아주 어려운 일이죠. 확신에도 그 정도가 있잖아요. 어떤 문제에 대한 개인적인 입장은 어느 시점에 가면 확신이 서겠죠."


여기서 잠깐 멈추고, 여섯 번째와 마지막 단계를 구분해서 이야기해보자. 여섯 번째 단계에서 사람들은 어떤 문제에 대한 다양한 연구를 살피고, 증거를 찬찬히 숙고한 다음, 잠정적인 결론을 내린다. 증거와 의견들을 여러 관점에서 비교해 그 상대적인 무게를 고려하고 해결책의 유용성을 판단한 뒤, 이 시점에 결론을 도출해야 할 실리적인 이유가 있는지 결정한다.


일곱 번째 단계의 사람들은 비구조화된 문제와 맞닥뜨렸을 때, 퍼트리샤와 캐런이 말하는 '합리적 탐구'를 통해 지식을 구축하고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사실을 의식적으로 인지한다. 그저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증거를 통해 합리적이고 개연성있는 결론을 이끌어 내고, 새로운 증거나 참신한 시각 또는 새로운 연구 수단이 나타나면 재평가에 들어간다. 증거를 검토할 때는 가장 가능성 높은 것은 무엇인지 자문해 본다. 퍼트리샤와 캐런의 연구에 참여한 학생은 말했다. "어떤 주장을 평가하려면 그 명제가 얼마나 면밀한지, 어떤 추론과 증거를 사용했는지, 그 사람이 다른 주제에 대해 펼쳤던 주장에 비해 얼마나 일관성 있는지 보면 돼요."


이런 높은 차원의 사고력은 깊이 있는 학습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최고 단계의 합리적 탐구는 지식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반영하며, 인생에서 어려운 선택을 할 때 바로 그러한 이해가 큰 영향을 미친다. 어떤 방식으로 판단을 내리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어떤 학생, 어떤 사람이 될지 결정된다.

(중략)

최고의 수준의 학생들은 한 조각이 더 큰 그림에 맞춰지는 원리를 이해한다. 그들은 어떤 문제나 주장을 분해해서 분석하고, 그 해결책에 일반 원칙을 적용한다. 아이디어를 서로 비교, 대조하고, 원인을 설명하며, 아이디어들을 통합시킬 줄 안다. 뿐만아니라, 한 가지 주제에 대한 아이디어나 주장을 완전히 다른 영역에 적용할 줄 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에서 새로운 이론을 도출해 낸 다음 그 가설을 시험하는 이런저런 방법들을 생각한다.


<출처 : BOOK - 최고의 공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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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들은 심오한 목적을 가지고 독서를 한다. 책을 펴기 전에 여러가지 의문을 머릿속에 담아 둔다. 무슨 내용일까? 요점은 뭐지? 다른 주제들과 어떻게 연결될까? 내 생각을 어떻게 자극할까? 그들은 글 속에 담긴 의미를 찾고, 그것을 다른 문제에 적용하는 경향이 있다. 추리 소설의 탐정처럼 글의 내용을 깊이 파고들면서, 거기서 생겨나는 의문들로 더 많은 것을 탐구한다. 문자와 낱말은 개념, 사건, 사상 같은 책 바깥의 현실을 상징하는 기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들은 잘 알고 있다. 글 뒤에 숨어 있는 의미를 모색하고, 인쇄된 글자를 창문 삼아 다른 뭔가를 보기 위해 애쓴다.


2. 독서를 시작하기 전에 책 속에서 발견할 것들을 추측하고, 책을 읽어 나가면서 그 예측들을 확증하거나 떨쳐 낸다. 훌륭한 독자는 책의 내용을 미리 상상한다. 의문점들과 가능한 해결책을 짐작한 다음, 그 추축들을 책의 실제 내용과 비교한다. 이런 습관은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만, 또 다른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정답'을 찾기 전에 추측하고 짐작하는 습관을 기른 사람들은 흔치 않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능력이 뛰어난 융통성 있는 전문가가 될 확률이 높다. 그들은 상투적인 방식이 통하지 않는 미지의 문제에 도전하는 것을 즐긴다. '배우기' 전에 추측하는 경험을 한 사람이라면, 아주 명백해 보여 쉽게 떠오르는 답이 나중에 전문가의 답과 비교해 보면 한참 모자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알 것이다. 그다음 번에는 좀 더 신중하게, 자신의 생각에서 허점을 찾을 것이다. 학습 과학자 존 브랜스퍼드는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려면 이전에 고수하던 개념과 행동을 버려야" 한다면서, 권위자의 글을 읽기 전에 가능한 답들을 먼저 추측하는 습관을 기르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3. 그들은 책(특히 논픽션)을 읽기 전에 이런저런 식으로 검토부터 한다. 차례를 보면서 그 목적과 구조에 대한 단서를 찾고, 책의 내용을 요약해 놓은 개요를 읽고, 제목들을 쭉 훑어보고, 논거와 결론을 인지한다. 이 책은 귀납적인 구조를 취하고 있는가, 아니면 연역적인 구조인가? 언제 출간되었는가? 내가 저자에 대해 아는 사실은? 저자는 왜 이 책을 썼는가? 그가 답하고자 하는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책을 읽기 전에 30~60분 동안 그 책에 대한 질문들을 생각합니다." 목록이나 도표가 있는가? 그것들이 의미하는 바는 뭘까? 이 책은 시리즈 중 한 권인가? 그렇다면 그 시리지의 목적은 무엇이고, 이 책은 그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나는 이 책에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나는 어떤 의문에 답하려고 하는가? 이 책은 그 의문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가, 아니면 내 주된 관심사에서 조금 벗어난 중요한 문제에 집중하고 있는가? 나는 학술 논문의 초록을 잘 이해하고 있는가? 본격적인 내용으로 들어가기 전에 초록을 읽어야 할까?


4. 우리 최고의 학생들은 책을 읽으면서 더 큰 문제와의 연결 고리를 찾고, 잠시 멈춰 깊은 생각에 빠진다. 책의 여백에 메모를 하거나 공책에 자신의 견해를 적어 둔다. 가끔 자신이 묻고 싶은 의문들로 고심하기도 하지만, 이는 그들 독서 과정의 일부가 된다. 

특히 과학, 수학, 공학 분야에서 연결성을 찾는 일이란, 개념을 머릿속에 그려 보고, 아이디어들의 속뜻과 그 응용 방법을 생각하고, 어떤 주장이나 실험의 논거에 대해 묻고, 각 단계 뒤에 숨어 있는 아이디어들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그 새로운 이해를 더 큰 문제에 적용하는 것이다.


5. 허구 문학을 읽을 때는 다양한 방식으로 작품과 교감한다. 이 소설이 제기하는 철학적 문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지금의 내 인생과 앞으로 내가 창조하고픈 세상에 정면으로 맞서는 데 도움이 될까? 그들은 시의 아름다움과 리듬을 감상할 줄 아는 것은 물론이고, 모든 문학은 문화의 번영으로서, 시간과 장소의 거울로서 탐구할 줄도 안다. 문학에 담긴 도전적인 가치관과 시각을 깊이 생각하고, 생각과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상징과 은유를 분석할 줄 안다. 이 소설은 목표 추구의 이야기인가? 더 넓은 세상의 축소판? 하나의 긴 여정보다는 동물원이나 박물관 같은 소설인가? 특정 감정을 뽑아 내기 위해 언어는 어떤 식으로 사용되는가? 나는 왜 울거나 웃는가? 이 소설은 내 연민을 자아내는가? 다른 세상을 간접 체험하며 작가의 가치관과 시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가? 시간과 공간, 리듬과 움직임, 실루엣과 소리를 어떻게 다루는가? 다른 분야, 예를 들면 물리학과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주제에 접근하는가? 내가 속한 문화는 어떤 식으로 그 주제를 다루는가? 이 작품은 정의와 도덕의 문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보는 데 도움이 되는가?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하면 이 희곡이나 소설에 독특한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을까? 내 배경과 출신을 고려할 때, 이 작품이 사용하는 문학적 관습에 나는 왜 이런 식으로 반응할까?


6. 논픽션을 읽을 때는 먼저 논점들을 찾고, 모든 주장이 하나의 논점 안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논점은 결론과 그 전제를 담고 있음을 깨닫는다. 가끔은 명확하게 표현되기보다는 암시되는 결론이나 전제들이 있다는 사실도 있다는 걸 인지한다. 

한 논점을 적극적으로 풀어 헤쳐 분석하면, 각 부분들에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전제들이 결론을 뒷받침해 주는가? 같은 정보로부터 어떤 대안을 뽑을 수 있을까? 이 책이 놓치는 부분은? 전제를 받아들이면 결론도 받아들여야 할까? 논거가 개연성이 있는가? 이 논점은 어떤 주된 개념을 사용하며, 어떤 가졍을 하고 있는가? 내가 다른 수업에서 또는 인생에서 배운 것과 연결되는 지점은 없는가?


7. 그들은 논거의 질과 성격을 평가한다. 추론에서 비롯된 논거라면, 그 추론은 무엇으로부터 이끌어 낸 것인가? 같은 논거를 다른 방법으로 볼 수는 없을까? 관찰에서 비롯된 논거라면 누가, 어떤 시각으로 관찰한 사실인지 알아야 할까?


8. 그들은 지금 읽는 책과 전에 읽었던 다른 글들이 서로 일치하고 불일치하는 점들을 인지한다. 두 저자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할 수도 있다. 또는 서로 다른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입장에서는 일치하거나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 휘말린 원인에 대해 똑같은 생각을 가진 두 역사학자가 그때 미국이 어떻게 했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를 수도 있다. 그 이견이 순전히 가치에 대한 것이라면, 논거는 그리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믿음의 차이라면, 그때는 논거가 중요해진다. 상충되는 입장은 가끔 믿음의 차이에서 비롯되기도 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가. 이런 점을 깊이 생각하며 책을 읽으면 정신이 더욱 예리하고 체계적으로 발전할 것이다.


9. 우리의 연구 대상들은 책을 읽으면서 개요를 작성하고, 나중에 메모를 거듭해 그것을 점점 줄여 나간다. 그 과정에서 논거와 결론을 평가하고, 사용된 개념과 가정을 인지하고, 그 함축적 의미와 적용법을 생각한다. 사전을 항상 옆에 끼고 있으면서 생소한 단어들을 찾아보거나 문맥으로 의미를 짐작한 다음 사전을 확인해 자신의 추측을 시험해 본다.


10. 그들은 모든 인지 활동을 동시에 한다. 기억하고, 이해하고, 응용하고, 종합하고, 평가한다. 하지만 이러한 정신 활동을 통합적인 형태가 아니라 차례대로 공략하도록 강요하는 대학 강의들이 많다. (중략) 벤자민 블룸과 그의 동료들이 인간의 두뇌가 할 수 있는 활동들(기억,이해,응용,분석,종합,평가)의 목록을 내놓았을 때, 그것들이 차례대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데도 많은 교수가 그런 식으로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11.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가르칠 준비를 하는 것처럼 책을 읽는다. 심리학자인 존 바그와 그의 동료들은 학생들이 마치 다른 사람에게 가르칠 준비를 하는 것처럼 공부하면 암기력과 이해력이 더 올라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제는 고전이 된 한 실험에서, 존 바그는 한 그룹의 학생들에게 낱말을 주면서 스스로 공부하게 했다. 다른 아이들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가르칠 준비를 하라고 일렀다. 드 번째 그룹은 실제로 아무도 가르치지 않았지만, 훨씬 더 많은 단어들을 기억했다. 우리 최고의 학생들은 이러한 원리를 단순히 암기뿐만 아니라 개념의 함축적인 의미와 응용법을 이해하는 데도 적용했다. (중략) 세인트올라프 칼리지의 한 학부생은 이렇게 전했다. "아주 복잡한 과학 개념을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가르치려면 개념을 속속들이 이해해야 하고, 가르치는 방법을 설계할 때는 창의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래서 공들여 공부하게 된다.


우리가 만나서 인터뷰한 사람들 중 많은 이가 "나는 사실 공부를 그리 많이 하지는 않았습니다. 책은 많이 읽었지만요"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은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들은 도서관에서 책을 읽거나 실험실에서 실험을 하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즉, 벼락치기나 기게적인 암기에 의존하지 않고, 끊임없이 의문을 품으며 깊이 있게 파고들었다. 책을 읽을 때는 개념과 논증들을 분석했다. 이 개념이나 정보의 어떤 점이 내 흥미를 끌고 있는가? 그것은 내 가치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그것은 이치에 맞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다른 수업에서 토론했던 주제나 중요한 문제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이렇듯 의문을 제기하면서 깊이 탐구하면, 이해와 응용은 물론 암기까지 용이해 진다.


- [Book ] 최고의 공부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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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만에 그래픽 노블을 한 권 읽었습니다. 그래픽 노블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만화책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내용이 풍부해서 일반 만화책 보다는 글밥이 많이 있습니다. 만화책인지 알고 집어든 첫째 아이가 '아빠 이거 글씨가 너무 많어~!' 하더니 살며시 내려 놓더군요.

그래픽 노블은 어떤 책들이 있는지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 중 나치 수용소의 모습을 담은 아트 슈피겔만의 『쥐』 와 스페인 내전 당시를 묘사하는 안토리오 알타리바와 킴의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은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좋은 작품입니다.


최근에는 『팔레스타인』이라는 책을 만났습니다. 여러분은 '팔레스타인'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인가요?

아마 많은 분들이 '테러', '난민',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분쟁' 등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생각날 것입니다. 왜 이런 이미지들이 일반 사람들의 생각에 각인이 된 걸까요? 그리고 어떤 배경에서 '테러', '난민', '분쟁'이 발생하는 걸까요? 예전부터 언론에서 관련 해외 사건 보도가 나올 때마다 생각했던 질문입니다. 뒤늦게야 『팔레스타인』이라는 책을 만나고 그 궁금증을 조금 해소해봅니다. 그리고 조금 더 객관적으로 바라봐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 비극의 시작 - 맥마흔 선언과 벨푸어 선언


비극의 시작은 영국으로 부터 시작됩니다. 1차 세계 대전 당시 중동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는 땅이었습니다.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치르고 있던 영국은 중동의 아랍인들을 설득해 오스만 제국에 반란을 일으키도록 합니다. 그리고 이때 전쟁에 협조하는 조건으로 아랍인들의 독립을 약속합니다. 바로 1915년의 맥마흔 선언입니다. 하지만 영국은 똑같은 땅을 두고 또 다른 약속을 합니다. 1차 세계대전 중 영국은 독일과의 전쟁에서 미국의 참전을 유도하기 위해 미국내 유대인들의 영향력과 재원을 활용하기로 합니다. 그 조건으로 영국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 건설을 약속을 합니다. 1917년의 벨푸어 선언입니다. 바로 영국의 이중계약이 지금의 비극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영국은 이 문제를 UN으로 넘깁니다. 유엔은 총회에서 팔레스타인 지역을 분할해서 유대인 국가와 아랍인 국가를 세우는 것을 통과시킵니다.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은 팔레인스타인으로 모이게 되고 1948년 이스라엘을 건국하게 됩니다. 하지만 2000년이 넘는 동안 그 땅에 살고 있던 이들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후 중동 지역은 화약고로 변하게 됩니다.

▲ 지역적 위치


▲ 되풀이되는 중동의 비극 끝낼 방법 없나 - 중앙일보



■ 이스라엘과 그 뒤의 미국


▲  미국-이스라엘 공공문제 위원회 (AIPAC - The American Israel Public Affair Committee)


궁금한 점이 하나 생깁니다. 어떻게 아랍 연합국이라 할 수 있는 국가들을 어떻게 국가의 틀을 만든지 얼마 되지 않는 나라가 이겨내는 것일까요? 

이스라엘의 뒤에는 든든한 '미국'이라는 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내 유대인은 전체의 3%를 차지하는 많지 않은 수 입니다. 그런데 이 소수가 미국의 금융, 석유, 식량, 경제, 연예계, 학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미국의 양 정당인 공화당과 민주당에 엄청난 기부를 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 중심에는 미국-이스라엘 공공문제 위원회(AIPAC)가 있습니다. 


미국의 대선 후보는 미국-이스라엘 공공문제 위원회에서 연설을 합니다. 이들이 누구 편에 서냐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 위원회는 워싱턴의 1,2위를 다투는 로비단체입니다. 미국 의회와 행정부가 이스라엘을 지지하게 만들고 공적인 토론에서 이스라엘이 비판받지 않고 긍정적으로 묘사되기 위한 전략을 세웁니다. 또한 AIPAC 의 의견과 반대되는 후보들이 나오면 그 반대 정당을 지지하면서 그들을 지지하지 않는 이들을 낙마시킵니다. 


이런 결과들이 이스라엘을 중동의 한 가운데에서 가장 강력한 화기를 갖춘 국가로 만듭니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1400억 달러 이상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976년 이후 언제나 미국 해외 원조의 최대 수혜국이며 수혜국 중 유일하게 원조액을 사용한 내역을 보고할 의무가 없는 국가입니다. 미국은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과 공유하지 않는 정보까지 이스라엘과 공유를 하며 다른 동맹국들에게 판매하지 않는 무기까지 판매하기까지 합니다. 심지어 1960년대 이스라엘이 비밀 핵무기 개발하는 것 까지 용인해 줍니다. 


1982년 이래 유엔 아보리에서 이스라엘에 비판적인 결의안을 통과를 막으려 미국은 33차례나 거부권을 행사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유엔 총회에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내 불법 정착촌 건설 중단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킬 때에는 찬성 115, 반대 2표 였습니다. 2표는 이스라엘과 미국이었습니다.



■ 가려진 이야기


우리가 해외 언론에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소식을 들을 경우 거의 대부분은 팔레스타인들의 이스라엘 테러 관련된 소식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인식에는 팔레스타인에 조금은 더 부정적이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이스라엘이 선(善)이고 팔레스타인이 악(惡)일까요? 한 번 쯤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시선은 상당히 고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련 보도의 정확성-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의 사례연구> 라는 논문을 보면 미국에서는 팔레스타인 어린이보다 이스라엘 어린이 사망기사 통계상 30배 이상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 사망하는 빈도는 그 반대입니다. CNN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적 보도를 한 적이 있었는데 CNN 간부는 하루 수백 통의 불만 메일을 받았다고 합니다. 또한 비판적 보도를 한 NPR(공영라디오방송)은 100만 달러 이상의 후원금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이렇게 한 번 걸러진 소식들이 우리들에게 들어옵니다. 언론에서 관련 소식을 듣는 다면 이제는 한 번쯤은 다른 각도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영토변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조금 더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토에 대해서도 조금 알 필요가 있습니다. 위의 지도처럼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영토에 팔레스타인은 팔레스타인 영토에 거주하고 있다면 문제는 덜 할 것입니다. 심지어 720km 에 달하는 국경에 이렇게 분리장벽까지 만들어 버렸으니까요.

그런데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팔레스타인 지역(서안지구) 내에 이스라엘 정착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이스라엘 군이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구도 20만명을 넘어섭니다.


▲  이스라엘이 건설한 팔레스타인을 분리하는 장벽 (약 720km) 


▲  팔레스타인에 건설된 이스라엘 정착촌



팔레스타인 지역 내에 건설된 이스라엘 정착촌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갈등의 골을 더욱 깊이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1987년 부터 팔레스타인의 민중봉기운동인 인티파다가 시작됩니다. 팔레스타인의 해방과 독립을 바라는 민중의 바람이 투영된 것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에 저항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방법은 별로 없습니다. 화력으로 무장한 이스라엘 군인에게 할 수 있는 건 돌을 던지며 저항하는 것 뿐입니다. 


이런 저항이 일어난 다음 날은 이스라엘군이 운동에 가담한 사람들은 찾기 위해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들을 잡아가 우리나라의 군사정권시기와 비슷한 고문을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정착촌을 만들기 위해서 팔레스타인들을 거주지역에서 몰아내기도 합니다. 팔레스타인 민중들은 또 다시 돌을 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  이스라엘 군들에게 돌을 던지는 팔레스타인 인들 - 출처 : 연합뉴스


▲  이스라엘 군들에게 돌을 던지는 팔레스타인 인들


어쩌면 제가 이 글을 쓰면서 팔레스타인 편향적으로 썼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모두 그들 만의 투쟁 이유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들은 약자의 입장에서 너무나 많은 희생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영국과 UN에 의해서 그동안 살고 있던 땅에서 쫓겨나고 살던 터전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스라엘은 그 지역의 구속력을 강화합니다. 그들은 단지 그 땅에서 살고 있었던 이유 만으로 그렇게 희생을 강요당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들의 저항은 '테러'라는 이름으로 변하여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부정적으로 인식될 뿐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처럼 상식적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힘과 권력이 만들어 놓은 산물이 상식으로 바뀌는 경우가 더 많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알고 싶은 것은 진정한 상식과 만들어진 상식을 구별할 줄 아는 시선입니다. 당연하게 받아들여 오던 것들을 조금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조금 더 비판적으로 받아들여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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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은 3년 전에 한 번 읽어본 책입니다. 소설은 한 번 읽고 잘 보지 않는 편이지만, 그녀의 언니 '샬롯 브론테' 덕분에 다시 한 번 『폭풍의 언덕』을 잡게 되었네요. 지난 여름에는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 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매력적인 인물인 제인 에어의 삶 속을 함께 거닐며,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나가고 자신의 진정한 내면에 끊임없이 질문하면서 사랑과 삶을 선택해나가는 모습에 빠져 있었지요. 당시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들의 삶을 알고 나면 『제인 에어』의 진가를 다시 한 번 알게 됩니다. 보통 한 작품을 읽으면 그 작가의 다른 책으로 뻗어 나가게 되는데 이번에는 그렇다면 그녀의 동생은 어떤 작품을 썼을까가 궁금했습니다. 희미해진 기억을 살려내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폭풍의 언덕』으로 들어갔지요. 


『폭풍의 언덕』은 액자구조 입니다. 이야기 속에 이야기가 있는 것이지요.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히스클리프에게 세를 얻어서 드러시크로스에 사는 '록우드' 라는 인물이 '넬리 딘' 이라는 하인에게 이야기를 듣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는 워더링 하이츠와 드러시크로스라는 두 공간적 배경에서 벌어지는 사랑과 복수라는 진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 등장인물 관계도


언쇼 어른은 어느 날 리버풀에 다녀오면서 부모없이 떠돌던 한 남자 아이를 데리고 옵니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예전에 죽은 아들의 이름인 '히스클리프'라고 지어줍니다. 언쇼의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히스클리프를 미워하게 됩니다. 반면에 딸인 캐서린은 히스클리프를 사랑하게 됩니다. 하지만 언쇼가 죽으면서 상황에 변하기 시작합니다. 힌들리는 히스클리프를 학대하고 집안의 하인 취급을 합니다. 그리고 캐서린은 린튼 집안의 에드거와 결혼하게 되죠. 그리고 히스클리프는 워더링 하이츠를 떠납니다. 그러던 어느날 모든 것이 변한 히스클리프가 나타납니다. 복수가 시작되는 것이죠.


■ 이야기 속의 시대는?


『폭풍의 언덕』을 지금의 시각으로 읽다 보면, 이해가 잘 안되거나 불편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1847년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 쓰여졌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소설 속에서 상당히 불편했던 점은 이사벨라가 히스클리프의 아내가 된 후 워더링하이츠에 데리고 왔을 때의 모습, 이사벨라가 죽은 후 린튼이 아버지 히스클리프에게로 가는 순간, 캐서린(에드거의 딸)이 린튼과 결혼하자 히스클리프가 며느리를 데려가야 한다고 하는 장면입니다. 아내, 자식, 며느리가 되는 순간에 철저하게 위계가 생기며 모든 것이 남자의 권한으로 넘어옵니다. 그래서 그 사회적 틀에 의해서 히스클리프에게 억압되는 인물들이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히스클리프의 복수를 보게 되면 결국 언쇼 집안과 린튼 집안의 재산을 모두 그가 차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의 하나로 '상속'이라는 방법을 택합니다. 즉 자신의 아들인 린튼을 캐서린(에드거의 딸)과 결혼을 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에드거가 사망했을 때 재산은 캐서린의 것이 되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캐서린의 남편인 린튼 것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분도 지금과는 차이가 좀 있습니다.


인물 관계도를 보면 캐서린(에드거의 딸)은 린튼과 결혼을 합니다. 그리고 린튼, 히스클리프가 죽은 후에는 아마도 헤어튼과 결혼을 하게 될 거 같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관계를 보면 린튼은 캐서린의 이종사촌이고 헤어튼은 고종사촌입니다. 이건 뭐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당시는 왕족과 귀족들은 혈통을 유지한다는 명목과 상속과 같은 금전적 요소들 때문에 근친혼이 가능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합스부르크 가에서는 합스부르크 립(주걱턱이라 불리는 하악전돌증)과 같은 유전병도 등장을 한 것입니다. 


■ '사랑'이라는 가면을 쓴 복수와 아동 학대

▲ 윌리엄 와일러 『폭풍의 언덕』, 1939


어쩌면 히스클리프와 캐서린과의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이 비극의 씨앗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안타까운 사랑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찬성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가면을 쓴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됩니다. 어쩌면 히스클리프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싸이코패스'가 아닐까 하는 생각 마저 들기도 했습니다.


히스클리프의 복수는 집요합니다. 그가 원한을 품었던 이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아이들까지 복수의 대상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그 수단으로 자신의 아들까지 이용을 합니다. 이런 부분은 읽는 내내 불편했습니다. 힌들리가 죽은 후, 히스클리프는 여러 수단을 통해서 워더링하이츠를 손에 넣습니다. 그리고 힌들리의 아들 헤어튼을 철저하게 세뇌교육을 시킵니다. 헤어튼은 분명 여러 재능이 있지만, 육체적인 것 외에는 관심을 두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죠. 소설 속 이야기지만 가장 화났던 부분은 비록 사랑하지 않은 여자 사이에서 낳은 아이지만 자신의 아이를 철저하게 자신의 계획을 위한 수단으로만 사용했다는 점입니다. 린튼은 자신의 아버지의 행동, 목소리 하나하나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 속의 악함을 드러내는 마지막 부분에서는 히스클리프의 아들이긴 하구나 하면서 동정심이 확 떨어지기는 합니다.


히스클리프가 캐서린(에드거의 딸)을 자신의 아들과 결혼시키기 위해 가둬두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 부분에서 캐서린이 소리지르고 화를 내자, 히스클리프는 그의 본성을 드러내며 캐서린에게 폭력을 가합니다. 이 부분을 읽을 때가 가장 속으로 화가 많이 났던 거 같습니다.


아마 히스클리프가 캐서린과의 사랑을 이루었다면 그 사랑을 지속할 수 있었을까요? 제 대답은 '아니오' 입니다. 그가 있어서 『폭풍의 언덕』 이라는 소설 속으로는 깊이 빠져들었지만, 현실에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인물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 에밀리 브론테, 그리고 『폭풍의 언덕』


이 작품은 『모비딕』,『리어왕』 과 함께 영문학 3대 비극으로 꼽힙니다. 그리고 『달과 6펜스』의 작가 서머싯 몸은 세계 10대 소설의 반열로 이 작품을 올려놓기도 했습니다. 


소설을 읽는 내내 긴장감은 팽팽하게 유지됩니다. 가계도를 그리면서 까지 읽을 정도로 서로 간의 관계를 파악하고 갈등을 읽어내려고 했습니다. 히스클리프의 악마적인 모습에 치를 떨면서 읽어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이 결국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듯 하지만, 그것이 다른 계기가 아니라 히스클리프의 죽음이 원인이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이 남기는 합니다. 해피엔딩을 꿈꾸는 독자의 일 인이거든요.


         ▲ 1834년 브론테 자매의 남동생 브란웰이 그린 초상 (왼쪽부터 앤 브론테, 에밀리 브론테, 샬롯 브론테, 가운데는 브란웰인데 그가 지운 것으로 보임)


작가인 '에밀리 브론테' 도 상당히 인상적이며 안타까운 인물입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영국 국교회 목사였습니다. 어머니는 그녀가 세 살때 세상을 떠납니다. 그녀는 언니들과 함께 비용이 싼 기숙학교에서 생활을 했는데 두 언니가 결핵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그 후 아버지는 살롯과 에밀리를 데리고 오지요. 1942년에는 언니 샬롯과 벨기에 수도 브뤼셀에서 어학을 배우고 같은 해 돌아오기도 합니다.


우리는 샬롯, 에밀리, 앤을 우리는 브론테 자매라고 합니다. 이들은 이례적으로 자매들 모두 문학적 성과를 얻어서 후대에 사람들의 주목을 받습니다. 하지만 에밀리 브론테는 『폭풍의 언덕』을 발표한 다음 해인 1848년 숨을 쉬기도 힘들 정도로 시달리다가 폐병으로 세상을 정리하게 됩니다. 그 때 그녀의 나이는 서른 살이었습니다. 그 다음 해에는 동생인 앤 역시 세상을 떠납니다. 그녀의 언니인 샬롯 브론테도 1855년에 서른 아홉살의 나이에 임신한 상태에서 사망을 하게 됩니다. 그녀들은 모두 후대에 기억되는 훌륭한 작품을 남기지만, 정작 그 삶은 안타까움이 짙게 묻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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