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제19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로 서점가는 그야말로 문재인 열풍이 시작되었다. 매 대선마다 그러했지만 이번은 조금 더 특별하다. 그 동안의 대선과는 조금 다른 대선이었기 때문이다.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이 결정된 후 진행된 조기 대선이었고, 새롭게 진보진영에서 대통령이 선출되었기 때문이다. 『문재인의 운명』은 참여정부를 마치고,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 한 이후인 2011년에 출간된 책인데, 이번에 대통령이 된 후에 다시 한 번 조명받게 되었다.
나 역시 평소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것들과 주변에서 듣는 정치 이야기만 알았지 실제로 새로운 대통령이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비전을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늦은 감이 있지만 뒤늦게 책을 들춰본다. 책 표지의 왼쪽 날개에 있는 문재인 대통령의 소개이다.
문재인
대한민국의 법조인, 시민운동가, 정치인. 1953년 경남 거제에서 태어나 경희대 법대를 졸업했다. 대학 시절, 유신반대 시위를 주도하다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 제적되었고, 1980년에는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1982년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수료했으나 시위 전력 때문에 판사로 임용되지 못하고 부산으로 내려와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동의대 방화사건 등 1980, 1990년대 시국 사건 대부분을 맡아 변론했다. 부산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장, 부산,경남 민변 대표, 노동자를 위한 연대 대표, 「한겨레」 창간위원으로 활동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는 부산에서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며 인연을 맺었고 줄곧 '동지적 관계'를 유지해왔다. 참여정부 출범과 함께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냈으나 건강이 나빠져 사직했다가 노 대통령이 탄핵을 당하자 달려와 변호인단을 꾸렸다. 2005년 다시 청와대로 들어와 시민사회수석, 비서실장을 지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전 변호인을 맡았고 서거 이후에는 장례 절차와 관련한 모든 일을 도맡았다.
노무현 재단 상임이사, 운영위원장, 아름다운 봉하 재단 감사를 맡았으며 노무현 대통령 기념사업이 가야 할 방향에 관심을 쏟았다. 제19대 총선에서 부산 사상구에 출마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범야권 단일후보로, 제18대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 그 이후에도 새정치민주연합 당대표, 더불어민주당 당대표로서 야권을 이끌었다.
제19대 대통령 선거에 더불어민주당 대통령후보로 나섰고, 마침내 2017년 5월 9일 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009년 5월 23일 나는 그 날을 지금도 기억한다. 그 해는 내가 입사한 해이다. 그리고 5월 23일이 토요일인데 주말 근무를 하러 선릉역에 있는 회사로 향했다. 그 날 방송에서 故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이 들려 왔다. 같이 일하는 선배들과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소식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고, 잠시 멍했던 것 같다. 그 중에는 故 노무현 대통령의 장례식장을 직접 찾으신 분도 계셨다. 솔직히 그때까지는 정치라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이 오직 취업에만 신경쓰고, 그 후 입사 후에는 회사에 적응하는 것이 바빴었다.
그리고 8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어이없이 여전히 나는 정치라는 것은 나와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이 살아가고 있으며 내 삶에 직접적인 영향이 없다고 느껴지기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이후에는 정말 '이게 나라인가?' 라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고, 광화문 광장에도 홀로 찾은 적이 있다.
진보와 보수를 떠나서 오천만 인구의 대표자는 그만한 역량과 품격 그리고 도덕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항상 힘을 가진 이들은 그들의 힘을 남용하는 것이 아닌 항상 다른 이들과 소통을 하려는 자세가 중요하다. 이것은 내가 짧은 회사 생활에서 겪은 경험들과 가족을 구성하며 살아가면서 느낀 생각이다. 가정, 회사도 그런데 국가는 말할 것도 없지 않은가. 하지만 분명 이명박, 박근혜 정부 때는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언론을 철저히 장악하고, 검찰을 마치 자신들의 권력 통치 수단으로 사용하며, 국정원을 마치 개인 사조직처럼 운영했다. 그리고 그들의 도덕성은 과연 어떠한가? 솔직히 그들은 아마도 도덕성은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거라고 확신한다.
그런데 故 노무현 대통령이 스스로 삶을 정리한 것은 도덕성과 다른 이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다. 그를 지지한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버리라' 고 했으며, 모든 것은 자기가 짊어지고 가려고 했다. 그리고 주변의 지인들과 언론을 통해서 들었을 때, 실제 정부부처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몸으로 느끼는 정도가 이명박, 박근혜 정부 때와는 확실히 달랐다. 한쪽이 권위였다면 다른 한 쪽은 탈권위였다. 누군가는 막아두고 숨겼지만 누군가는 열어두고 개방하고 공유했다.
새롭게 취임한 문재인 대통령은 처음에는 정치인의 길을 걸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다. 어쩌면 故 노무현 대통령께서 스스로 삶을 정리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는 지금 부산의 한 변호사 사무실에 앉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의 말대로 그는 운명처럼 정치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또 다시 운명처럼 선배이자 동지와 함께 했던 길을 이제 그의 자리에서 다시 한 번 걷게 되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故노무현 대통령의 8주기 행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님, 당신이 그립습니다, 보고싶습니다. 하지만 저는 앞으로 임기 동안 대통령님을 가슴에만 간직하겠습니다. 현직 대통령으로서 이 자리에 참석하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일 것입니다."
그렇다 한 들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이제 문재인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의 그림자와 빛을 모두 안고 그리고 모두 버리고 그만의 길을 가야 한다. 우리에게도 자랑하고 싶은 대통령이 필요하다. 은퇴 후에도 국민들에게 사랑받는 대통령이 필요하다. 그가 그렇게 되었으면 한다. 그러면 고마울 것 같다.
『82년생 김지영』 은 작년 가을에 출간된 책이다. 이 책은 출간될 때 부터 계속해서 읽어야지 하면서도 손에 잡지 못한 책이었다. 그런데 출간된지 기간이 어느 정도 지났음에도 여전히 서점의 판매 순위는 상위에 자리잡고 있다. 이런 책들은 무언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다시 한 번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지난 5월 19일, 문재인 대통령과 여야 5당 원내대표 간의 청와대 오찬이 있었는데,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가 이 책을 문재인 대통령에게 선물로 드린 것이다. 그리고 책의 속지에는 이런 글을 남겼다고 한다.
『82년생 김지영』 은 190 페이지 정도로 두껍지 않은 책이다. 그리고 소설도 아주 쉽게 읽혀서 두 세시간이면 충분히 읽을 정도의 분량이다. 그런데 짧은 독서 후에는 수없이 많은 생각이 머리에 스친다. 이 책을 읽은 독자를 남자와 여자로 구분한다면 그들은 아마도 서로 다른 생각으로 책을 쉽사리 접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남자의 입장에서 책을 읽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여자인 엄마, 여자인 내 아내, 아이들의 엄마인 내 아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의 저자인 조남주 작가는 <PD 수첩>, <불만 제로>, <생방송 오늘 아침> 등 시사교향 프로그램의 작가로 10년 동안 일을 해왔다. 그래서일까? 이 책의 내용들은 남자인 나에게 그대로 비수가 되어 찔러 버린다. 마치 시사 방송을 보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남자들은 그들의 행동을 잘 모른다. 그냥 평소의 일반적인 행동과 대화였다. 그런데 그것은 여자들에게는 날카로운 칼날로 향한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대부분의 여자들은 그 칼날에 상처가 남는다.
결국 면접장으로 가는 버스에서 깜빡 졸다가 내릴 정류장을 지나치고 말았다. 시간이 늦지는 않았지만 중요한 일을 앞두고 조바심 내면서 헤매기 싫어 곧바로 택시를 탔다. 머리를 말끔하게 빗어 넘긴 할아버지 기사님은 룸미러로 김지영 씨를 한번 흘끔 보더니 면접 가시나 보네, 했다. 김지영 씨는 짧게 네, 하고 대답했다.
"나 원래 첫 손님으로 여자 안 태우는데, 딱 보니까 면접가는 거 같아서 태워 준 거야."
태워 준다고? 김지영 씨는 순간 택시비를 안 받겠다는 뜻인 줄 알았다가 뒤늦게야 제대로 이해했다. 영업 중인 빈 택시 잡아 돈 내고 타면서 고마워하기라도 하라는 건가. 배려라고 생각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무례를 저지르는 사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항의를 해야 할지도 가늠이 되지 않았고, 괜한 말싸움을 하기도 싫어 김지영 씨는 그냥 눈을 감아 버렸다.
- 『82년생 김지영』 中, 100p -
머리를 말끔하게 빗어 넘긴 할아버지 택시 기사님은 면접을 보러가는 지영씨에게 마치 인심을 쓰는 듯이 말한다. "나 원래 첫 손님으로 여자 안 태우는데, 딱 보니까 면접가는 거 같아서 태워 준 거야." 어쩌면 이 할아버지는 진심으로 손녀 같은 손님을 배려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직 이 할아버지는 몇 십년 전의 생각에 머물러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은 내가 인심을 좀 썼네' 하며 스스로에게 만족감을 선물로 주었는지도 모른다. 이 할아버지 너무 했네.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내가 그 할아버지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놈의 돕는다 소리 좀 그만할 수 없어? 살림도 돕겠다, 애 키우는 것도 돕겠다, 내가 일하는 것도 돕겠다. 이 집 오빠 집 아니야? 오빠 살림 아니야? 애는 오빠 애 아니야? 그리고 내가 일하면, 그 돈은 나만 써? 왜 남의 일에 선심 쓰는 것처럼 그렇게 말해?
- 『82년생 김지영』 中, 144p -
김지영씨가 남편에게 불만을 토로하는 이 부분에서는 마치 나에게 하는 소리 같아서 심장이 두근거렸다. 방금 전에도 글을 쓰면서 '집안일을 도와준다' 라는 표현을 썼다가 서둘러 지웠다. 어쩌면 이런 게 더 무서운 건지도 모르겠다. 행위자는 스스로 만족하며, 마치 선(善)을 행하는 듯한 감정이 든다. 하지만 그 행위를 당하는 당사자는 전혀 다른 감정으로 상처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가하는 언어적, 육체적 폭력에는 어쩔 수 없이 당하는 입장이 되고 만다.
지난 5월 17일에는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 1주기' 관련된 집회가 강남역에서 있었다. 1년 전 강남역 남여 공용 화장실에서 발생한 끔찍한 살인사건, 범행 동기는 단지 '여자' 였기 때문이었다. 이유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기에 더 무섭고, 사람들의 충격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사건 1주기 그 날 다른 곳에서 역시 남여 공용 화장실에서 한 여자가 성폭행을 당할 뻔 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다행히 범인은 바로 잡혔다고 한다. 여성들은 단지 걸어다니는 그 자체로 위협을 받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그 여자는 남자들의 어머니, 아내, 누나, 동생 들이다.
이런 사건은 극단적인 예이다. 나를 포함한 다른 남자들은 당연히 그런 놈들을 비난한다. 당연히 이 사회에서 여자들은 남자들과 평등하다고 생각하고, 여자들을 배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평범한 남자들에게 『82년생 김지영』은 물어 본다. 당신은 어떠시냐고?
나는 항상 평범한 남자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건 내 관점일 뿐이었다. 어머니에게, 아내에게 너무나도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작품 속 김지영 씨가 겪는 일들은 내 아내가 겪은 일들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지금의 삶도 그 연장선 상에 있다.
우선 내 생각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여자들이 이 작품을 읽은 후기를 읽어보면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리며 읽는다고 한다. 또한 자기가 경험한 일들과 비슷한 일들이 너무나 많아서 읽는 내내 김지영 씨로 변한다고 한다. 가장 가깝고 소중한 이의 아픔을 외면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한 번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나와 태어난 해가 같은 82년생 김지영씨에게 감사하다.
p 42
"짝, 흑흑, 바꿔 주세요. 그리고 다시는, 어흐흑, 걔랑, 흑, 짝이 안 되게, 흑흑, 해 주세요."
선생님은 김지영 씨의 어깨를 토닥였다.
"근데 지영아, 선생님은 벌써 눈치채고 있었는데 지영이는 모르는 것 같네? 짝꿍이 지영이를 좋아해."
김지영 씨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눈물이 뚝 멈췄다.
"걔 저 싫어해요. 그동안 괴롭힌 거 다 아신다면서요."
선생님은 웃었다.
"남자애들은 원래 좋아하는 여자한테 더 못되게 굴고, 괴롭히고 그래. 선생님이 잘 얘기할 테니까 이렇게 오해한 채로 짝 바꾸지 말고, 이번 기회에 둘이 더 친해지면 좋겠는데."
짝꿍이 나를 좋아한다고? 괴롭힌다는 게 좋아한다는 뜻이라고? 김지영 씨는 혼란스러웠다.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빠르게 되짚어 봤지만 아무래도 선생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좋아한다면 더 다정하고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 친구에게도, 가족에게도,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나 고양이에게도 그래야 하는 거다. 그게 여덟 살 김지영 씨도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 아이의 괴롭힘 때문에 학교생활이 너무 힘들었다. 그리고 이제껏 당해 온 것도 억울한데, 친구를 오해하는 나쁜 아이가 되기까지 했다. 김지영 씨는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너무너무 싫어요."
다음 날 자리를 다시 정했다. 김지영 씨는 키가 가장 커서 늘 맨 뒷자리에 혼자 앉았던 남학생과 짝꿍이 되었고, 둘은 단 한 번도 다투지 않았다.
p 49
일곱 살 막둥이는 절대, 절대, 엄마와 잘 거라고 방 따위는 필요 없다고 주장했고, 어머니의 계획대로 자매는 자매만의 방을 갖게 되었다. 어머니는 자매의 방을 꾸며 주려고 아버지 몰래 돈을 따로 모아 두었다고 했다. 새 책상 두 세트를 사서 해가 잘 드는 창가에 나란히 놓았고, 옆 벽면에 새 옷장과 책장을 놓았고, 1인용 요, 이불, 베개 세트를 하나씩 새로 사주었다. 그리고 맞은편 벽에는 커다란 세계지도를 붙였다.
"여기 서울 좀 봐. 그냥 좀이야, 점.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이 점 안에서 복작복작하면서 살고 있다는 거다. 다 가 보진 못하더라도 알고는 살라고. 세상이 이렇게나 넓다."
p 92
"김지영 이제 걔랑 완전히 끝난 것 같던데?"
예전부터 김지영한테 관심 있지 않았느냐, 관심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잘해 봐라, 우리가 도와주겠다, 하는 여러 목소리들이 계속 들렸다. 처음에는 꿈인가 했는데 곧 정신이 들면서 방 안에 있는 무리가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밖에서 술을 마시던 복학생 선배들이었다. 김지영 씨는 이제 잠도 완전히 깼고 좀 덥기도 했는데 본인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불을 걷고 나갈 수가 없었다. 본의 아니게 민망한 대화를 엿듣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말했다.
"아 , 됐어. 씹다 버린 껌을 누가 씹냐?"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하지만 남에게 억지로 권하지는 않고, 후배들에게 밥을 잘 사 주지만 되도록 함께 먹지는 않는 선배였다. 태도가 단정하고 깔끔해서 김지영 씨도 항상 좋게 생각하고 있었다. 설마설마 싶어서 귀를 쫑긋 세우고 더 유심히 들었는데, 아무래도 그 선배의 목소리가 맞았다. 취했을 수도 있고, 쑥스러운 것일 수도 있고, 친구들이 괜한 짓을 할까 봐 더 과격하게 말했을 수도 있다.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김지영 씨의 처참한 기분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일상에서 대체로 함리적이고 멀쩡한 태도를 유지하는 남자도, 심지어 자신이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여성에 대해서도, 저렇게 막말을 하는구나. 나는 씹다 버린 껌이구나.
p 100
결국 면접장으로 가는 버스에서 깜빡 졸다가 내릴 정류장을 지나치고 말았다. 시간이 늦지는 않았지만 중요한 일을 앞두고 조바심 내면서 헤매기 싫어 곧바로 택시를 탔다. 머리를 말끔하게 빗어 넘긴 할아버지 기사님은 룸미러로 김지영 씨를 한번 흘끔 보더니 면접 가시나 보네, 했다. 김지영 씨는 짧게 네, 하고 대답했다.
"나 원래 첫 손님으로 여자 안 태우는데, 딱 보니까 면접가는 거 같아서 태워 준 거야."
태워 준다고? 김지영 씨는 순간 택시비를 안 받겠다는 뜻인 줄 알았다가 뒤늦게야 제대로 이해했다. 영업 중인 빈 택시 잡아 돈 내고 타면서 고마워하기라도 하라는 건가. 배려라고 생각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무례를 저지르는 사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항의를 해야 할지도 가늠이 되지 않았고, 괜한 말싸움을 하기도 싫어 김지영 씨는 그냥 눈을 감아 버렸다.
p 116
밤 12시가 조금 넘자 부장은 김지영 씨의 잔에 맥주를 가득 채우고는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당이 다 울릴 정도로 큰 목소리로 대리기사와 통화하고는 일행들을 향해 말했다.
"내 딸이 요 앞 대학에 다니거든. 지금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이제 집에 간다고 무서우니까 데리러 오라네. 미안한데 나는 먼저 갈테니까, 김지영 씨, 이거 다 마셔야 된다!"
김지영 씨는 겨우 붙잡고 있던 어떤 줄 하나가 툭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당신의 그 소중한 딸도 몇 년 후에 나처럼 될지 몰라, 당신이 계속 나를 이렇게 대하는 한. 그리고 갑자기 취기가 올라와서 남자치구에게 데리러 와 달라고 문자메시지를 모냈는데 아무 답이 없었다.
p 131
결국 호주제는 폐지되었다. 2005년 2월에 호주제가 헌법상의 양성평등 원칙에 위배된다는 헌법 불합치 결정이 나왔고, 곧 호주제 폐지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개정 민법이 공포되어 2008년 1월 1일부터 시행됐다. 이제 대한민국에 호적 같은 것은 없고, 사람들은 각자의 등록부를 가지고 잘 살고 있다. 자녀가 반드시 아버지의 성을 이어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혼인신고를 할 때 부부가 합의했다면 어머니의 성과 본을 따를 수 있다. 그럴 수는 있다. 하지만 자녀가 어머니의 성을 따른 경우는 호주제가 폐지된 2008년 65건을 시작으로 매년 200건 안팎에 불과하다.
"아직은 아빠 성을 따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긴 하지. 엄마 성을 따랐다고 하면 무슨 특별한 사정이 있다고 생각하겠지. 설명하고 정정하고 확인해야 할 일들도 많이 생기겠지."
김지영 씨의 말에 정대현 씨는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손으로 '아니요' 칸에 표시를 하는 김지영 씨의 마음이 왠지 헛헛했다.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 안의 소소한 규칙이나 약속이나 습관들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김지영 씨는 혼인신고를 하면 마음가짐이 달라진다는 정대현 씨의 말을 다시 한 번 곱씹었다. 법이나 제도가 가치관을 바꾸는 것일까, 가치관이 법과 제도를 견인하는 것일까
p 138
회사에서는 임신한 직원들의 안전을 위해 출근과 퇴근 시간을 30분씩 늦출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는데, 김지영 씨가 임신 사실을 알리자마자 남자 동기가 대뜸 말했다.
"와, 좋겠다. 이제 늦게 출근해도 되겠네."
그럼 너도 계속 구역질하고, 제대로 먹지도 싸지도 못하면서, 피곤하고, 졸립고, 여기저기 아픈 상태로 지내든지, 겉으로 말하지는 못했다. 임신으로 인해 겪는 모든 불편과 고통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동기의 말이 조금 서운하긴 했지만, 남편도 아니고 가족도 아닌 사람이 다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이다. 김지영 씨가 조용하자 오히려 같이 있던 또 다른 남자 동기가 나무라듯 말했다.
"야 30분 늦게 오신 30분 늦게 퇴근하잖아. 똑같이 일하는데 왜 그래?"
"우리가 칼퇴하는 회사도 아닌데 뭐. 그냥 30분 날로 먹는 거지."
홧김에 김지영 씨는 늦게 출근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똑같이 출근하고 똑같이 일할 거라고. 1분도 날로 먹을 생각 없다고. 그리고 미어터지는 지옥철을 견디기 힘들어 한 시간씩 일찍 출근하며 내내 섣불리 뱉어 버린 말을 후회했다. 어쩌면 자신이 여자 후배들의 권리를 빼앗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주어진 권리와 혜택을 잘 챙기면 날로 먹는 사람이 되고, 날로 먹지 않으려 악착같이 일하면 비슷한 처지에 놓인 동료들을 힘들게 만드는 딜레마.
p 144
"그놈의 돕는다 소리 좀 그만할 수 없어? 살림도 돕겠다, 애 키우는 것도 돕겠다, 내가 일하는 것도 돕겠다. 이 집 오빠 집 아니야? 오빠 살림 아니야? 애는 오빠 애 아니야? 그리고 내가 일하면, 그 돈은 나만 써? 왜 남의 일에 선심 쓰는 것처럼 그렇게 말해?
p 163
오랜만에 밖에서 마시는 커피는 맛이 좋았다. 바로 옆 벤치에는 서른 전후로 보이는 직장인들이 모여서 김지영 씨와 같은 카페의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얼마나 피곤하고 답답하고 힘든지 알면서도 왠지 부러워 한참 그들을 쳐다보았다. 그때 옆 벤치의 남자 하나가 김지영 씨를 흘끔 보더니 일행에게 뭔가 말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간간이 그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나도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커피나 마시면서 돌아다니고 싶다...... 맘충 팔자가 상팔자야...... 한국 여자랑은 결혼 안 하려고......
오늘 5.18 민주화운동 37주년을 맞아, 5.18 묘역에 서니 감회가 매우 깊습니다. 37년 전 그 날의 광주는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슬프고 아픈 장면이었습니다. 저는 먼저 80년 오월의 광주시민들을 떠올립니다.
누군가의 가족이었고 이웃이었습니다. 평범한 시민이었고 학생이었습니다. 그들은 인권과 자유를 억압받지 않는, 평범한 일상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저는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광주 영령들 앞에 깊이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오월 광주가 남긴 아픔과 상처를 간직한 채 오늘을 살고 계시는 유가족과 부상자 여러분께도 깊은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1980년 오월 광주는 지금도 살아있는 현실입니다.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역사입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이 비극의 역사를 딛고 섰습니다. 광주의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의 민주주의는 버티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저는 오월 광주의 정신으로 민주주의를 지켜주신 광주시민과 전남도민 여러분께 각별한 존경의 말씀을 드립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5.18은 불의한 국가권력이 국민의 생명과 인권을 유린한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에 맞선 시민들의 항쟁이 민주주의의 이정표를 세웠습니다. 진실은 오랜 시간 은폐되고, 왜곡되고, 탄압 받았습니다. 그러나 서슬 퍼런 독재의 어둠 속에서도 국민들은 광주의 불빛을 따라 한걸음씩 나아갔습니다.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일이 민주화운동이 되었습니다.부산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던 저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저 자신도 5.18 때 구속된 일이 있었지만 제가 겪은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광주의 진실은 저에게 외면할 수 없는 분노였고, 아픔을 함께 나누지 못했다는 크나 큰 부채감이었습니다. 그 부채감이 민주화운동에 나설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것이 저를 오늘 이 자리에 서기까지 성장시켜준 힘이 됐습니다.
마침내 오월 광주는 지난 겨울 전국을 밝힌 위대한 촛불 혁명으로 부활했습니다.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분노와 정의가 그곳에 있었습니다. 나라의 주인은 국민임을 확인하는 함성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나라를 나라답게 만들자는 치열한 열정과 하나 된 마음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감히 말씀드립니다. 새롭게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 위에 있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의 맥을 잇고 있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다짐합니다. 새 정부는 5.18 민주화운동과 촛불혁명의 정신을 받들어 이 땅의 민주주의를 온전히 복원할 것입니다. 광주 영령들이 마음 편히 쉬실 수 있도록 성숙한 민주주의 꽃을 피워낼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 사회의 일각에서는 오월 광주를 왜곡하는 폄훼하려는 시도가 있습니다.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역사를 왜곡하고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헌신으로 이룩된 이 땅의 민주주의 역사에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새 정부는 5.18 민주화운동의 진상을 규명하는 데 더울 큰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헬기 사격까지 포함하여 발포의 진상과 책임을 반드시 밝혀내겠습니다. 5.18 관련 자료의 폐기와 역사왜곡을 막겠습니다. 전남도청 복원 문제는 광주시와 협의하고 협력하겠습니다.
완전한 진상규명은 결코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아닙니다. 상식과 정의의 문제입니다. 우리 국민 모두가 함께 가꾸어야 할 민주주의 가치를 보존하는 일입니다.
5.18 정신을 헌법 전문에 담겠다는 저의 공약도 지키겠습니다. 광주정신을 헌법으로 계승하는 진정한 민주공화국 시대를 열겠습니다. 5.18 민주화운동은 비로소 온 국민이 기억하고 배우는 자랑스러운 역사로 자리매김될 것입니다. 5.18 정신을 헌법 전문에 담아 개헌을 완료할 수 있도록 이 자리를 빌려서 국회의 협력과 국민 여러분의 동의를 정중히 요청드립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님을 위한 행진곡'은 단순한 노래가 아닙니다. 오월의 피와 혼이 응축된 상징입니다. 5.18 민주화운도으이 정신, 그 자체입니다.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것은 희생자의 명예를 지키고 민주주의 역사를 기억하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님을 위한 행진곡'의 제창은 그동안 상처받은 광주정신을 다시 살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제창으로 불필요한 논란이 끝나기를 희망합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2년 전, 진도 팽목항에 5.18의 엄마가 4.16의 엄마에게 보낸 펼침막이 있었습니다. "당신 원통함을 내가 아오. 힘내소. 쓰러지지 마시오." 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국민의 생명을 짓밟은 국가와 국민의 생명을 지키지 못한 국가를 통렬히 꾸짖는 외침이었습니다. 다시는 그런 원통함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국민의 생명과 사람의 존엄함을 하늘처럼 존중하겠습니다. 저는 그것으로 국가의 존재가치라고 믿습니다.
저는 오늘, 오월의 죽음과 광주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며 세상을 알리려 했던 많은 이들의 희생과 헌신도 함께 기리고 싶습니다.
1982년 광주교도소에서 광주진상규명을 위해 40일 간의 단식으로 옥사한 스물아홉 살, 전남대생 박관현, . 1987년 '광주사태 책임자 처벌'을 외치며 분신 사망한 스물다섯 살, 노동자 표정두. 1988년 '광주학살 진상규명'을 외치며 명동성당 교육관 4층에서 투신 사망한 스물네 살, 서울대생 조성만, 1988년 '광주는 살아있다'고 외치며 숭실대 학생회관 옥상에서 분신 사망한 스물다섯 살, 숭실대생 박래전.
수많은 젊음들이 5월 영령의 넋을 위로하며 자신을 던졌습니다. 책임자 처벌과 진상규명을 촉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국가가 책임을 방기하고 있을 때, 마땅히 밝히고 기억해야 할 것들을 위해 자신을 받쳤습니다. 진실을 밝히려던 많은 언론인과 지식인들도 강제해직되고 투옥당했습니다.
저는 오월의 영령들과 함께 이들의 희생과 헌신을 헛되이 하지 않고 더 이상 서러운 죽음과 고난이 없는 대한민국으로 나아가겠습니다. 참이 거짓을 이기는 대한민국으로 나아가겠습니다.
광주시민께도 부탁드립니다. 광주정신으로 희생하며 평생을 살아온 전국의 5.18들을 함께 기억해 주십시오. 이제 차별과 배제, 총칼의 상흔이 남긴 아픔을 딛고 광주가 먼저 정의로운 국민통합에 앞장서 주십시오. 광주의 아픔이 아픔으로 머무르지 않고 국민 모두의 상처와 갈등을 품어 안을 때, 광주가 내민 손은 가장 질기고 강한 희망이 될 것입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오월 광주의 시민들이 나눈 '주먹밥과 헌혈' 이야말로 우리의 자존의 역사입니다. 민주주의의 참모습입니다. 목숨이 오가는 극한 상황에서도 절제력을 잃지 않고 민주주의를 지켜낸 광주정신은 그대로 촛불광장에서 부활했습니다. 촛불은 5.18 민주화운동의 정신 위에서 국민주권시대를 열었습니다. 국민이 대한민국의 주인임을 선언했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국민의 뜻을 받드는 정부가 될 것임을 광주 영령들 앞에 천명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하고 서로의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대한민국이 새로운 대한민국입니다. 상식과 정의 앞에 손을 내미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숭고한 5.18 정신은 현실 속에서 살아 숨쉬는 가치로 완성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삼가 5.18 영령들의 명복을 빕니다. 감사합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여러분. 감사합니다. 국민 여러분의 위대한 선택에 머리 숙여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는 오늘 대한민국 19대 대통령으로서 새로운 대한민국을 향해 첫걸음을 내딛습니다. 지금 제 두 어깨는 국민 여러분으로부터 부여받은 막중한 소명감으로 무겁고, 제 가슴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열정으로 뜨겁습니다. 지금 제 머리는 통합과 공존의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청사진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가 만들어가려는 새로운 대한민국은 숱한 좌절과 패배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선대들이 일관되게 추구했던 나라입니다. 또 많은 희생과 헌신을 감내하며 우리 젊은이들이 그토록 이루고 싶어했던 나라입니다. 그런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저는 역사와 국민 앞에 두렵지만 겸허한 마음으로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으로서의 책임과 소명을 다할 것임을 천명합니다.
함께 선거를 치른 후보들께 감사의 말씀과 함께 심심한 위로를 전합니다. 이번 선거에서는 승자도 패자도 없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대한민국을 함께 이끌어가야 할 동반자입니다. 이제 치열했던 경쟁의 순간을 뒤로하고 함께 손을 맞잡고 앞으로 전진해야합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지난 몇 달 우리는 유례없는 정치적 격변기를 겪었습니다. 정치는 혼란스러웠지만 국민은 위대했습니다. 현직 대통령의 탄핵과 구속 앞에서도 국민들이 대한민국의 앞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전화위복의 기회로 승화시켜 새로운 길을 열었습니다. 우리 국민들은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승화시켜 마침내 오늘 새로운 세상을 열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위대함은 국민의 위대함입니다.
그리고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우리 국민들은 또 다른 역사를 만들어주셨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골고른 지지로 새로운 대통령을 만들어주셨습니다. 오늘부터 저는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저를 지지하지 않은 국민 한분 한분도 저의 국민이고, 우리가 섬기겠습니다.
저는 감히 약속드립니다. 2017년 5월 10일, 이 날은 진정한 국민 통합이 시작되는 날로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힘들었던 지난 세월 국민들은 이게 나라냐고 물었습니다. 대통령 문재인은 그 질문에서 새로 시작하겠습니다. 오늘부터 나라를 나라답게 만드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구시대의 잘못된 관행과 과감히 결별하겠습니다. 대통령부터 새로워지겠습니다.
우선 권위적 대통령 문화를 청산하겠습니다. 준비를 마치는 대로 지금의 청와대에서 나와 광화문 대통령 시대를 열겠습니다. 참모들과 머리와 어깨를 맞대고 토론하겠습니다. 국민과 수시로 소통하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주요 사안은 대통령이 직접 언론에 브리핑하겠습니다.
퇴근길에는 시장에 들러 마주치는 시민들과 격의없는 대화를 나누겠습니다. 때로는 광화문광장에서 대토론회를 열겠습니다. 대통령의 제왕적 권력을 최대한 나누겠습니다. 권력기관은 정치로부터 완전히 독립시키겠습니다. 그 어떤 권력기관도 무소불위 권력행사를 하지 못하게 견제장치를 만들겠습니다.
낮은 자세로 임하겠습니다. 국민과 눈높이를 맞추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안보위기도 서둘러 해결하겠습니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 동분서주하겠습니다. 필요하면 곧바도 워싱턴에 날아가겠습니다. 베이징과 도쿄에도 가고, 여건이 조성되면 평양에도 가겠습니다.
튼튼한 안보는 막강한 국방력에서 비롯됩니다. 자주국방력 강화를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북핵 문제를 해결할 토대도 마련하겠습니다. 동북아 평화구조를 정착시켜 한반도 긴장완화의 전기를 마련하겠습니다.
분열과 갈등의 정치도 바꾸겠습니다. 보수와 진보의 갈등은 끝나야 합니다. 대통령이 나서서 직접 대화하겠습니다. 야당은 국정운영의 동반자입니다. 대화를 정례화하고 수시로 만나겠습니다.
전국적으로 고르게 인사를 등용하겠습니다. 능력과 적재적소를 인사의 대원칙으로 삼겠습니다. 저에 대한 지지 여부와 상관없이 유능한 인재를 삼고초려해 일을 맡기겠습니다.
나라 안팎으로 경제가 어렵습니다. 민생도 어렵습니다. 선거 과정에서 약속했듯이 무엇보다 먼저 일자리를 챙기겠습니다. 동시에 재벌개혁에도 앞장 서겠습니다. 문재인 정부 하에서는 정경유착이란 낱말이 완전히 사라질 것입니다.
지역과 계층과 세대간 갈등을 해소하고 비정규직 문제도 해결의 길을 모색하겠습니다. 차별없는 세상을 만들겠습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문재인과 더불어민주당 정부에서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이번 대통령 선거는 전임 대통령의 탄핵으로 치러졌습니다. 불행한 대통령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번 선거를 계기로 이 불행한 역사는 종식돼야 합니다.
저는 대한민국 대통령의 새로운 모범이 되겠습니다. 국민과 역사가 평가하는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서 지지와 성원에 보답하겠습니다.
깨끗한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빈손으로 취임하고 빈손으로 퇴임하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훗날 고향으로 돌아가 평범한 시민이 되어 이웃과 정을 나눌 수 있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국민 여러분의 자랑으로 남겠습니다.
약속을 지키는 솔직한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선거 과정에서 제가 했던 약속들을 꼼꼼하게 챙기겠습니다. 대통령부터 신뢰받는 정치를 솔선수범해야 진정한 정치발전이 가능할 것입니다. 불가능한 일을 하겠다고 큰소리치지 않겠습니다. 잘못한 일은 잘못했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거짓으로 불리한 여론을 덮지 않겠습니다. 공정한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특권과 반칙이 없는 세상을 만들겠습니다. 상식대로 해야 이득을 보는 세상을 만들겠습니다.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겠습니다. 소외된 국민이 없도록 노심초사하는 마음으로 항상 살피겠습니다.
국민들의 서러운 눈물을 닦아드리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소통하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낮은 사람, 겸손한 권력이 돼 가장 강력한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군림하고 통치하던 대통령이 아니라 대화하고 소통하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광화문 시대 대통령이 되어 국민들과 가까운 곳에 있겠습니다. 따뜻한 대통령, 친구같은 대통령으로 남겠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2017년 5월 10일 오늘 대한민국이 다시 시작합니다. 나라를 나라답게 만드는 대역사가 시작됩니다. 이 길에 함께 해주십시오. 저의 신명을 바쳐 일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한 사회의 습관이 갑작스럽게 달라지면 오래된 습관에 따라 생활하는 사람들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언제나 거추장스럽고, 거치적거리고, 후미진 구석에 다소곳이 격리되어 있으면 더 좋을 그런 이질적인 존재가 되고 만다. 그런 처지에 내몰린 당사자들은 무척 불안할 것이다. 자신의 삶이, 자신의 처지가, 자신의 앞날이...
이들을 괴롭히는 불안은 낯설면서도 엄청나게 방대한 세상에 의지할데 없이 혼자 내버려진 듯한 느낌에서 오는 것이다. 그래서 막연하기도 하고 원인을 특정하기도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천지개벽이 일어나 세상이 뒤집히지 않는 한 누가 쉽게 달래주기도 어렵고 치유되기도 힘든 불안이다.
P 97
아랫세대와는 살아온 습관이 달라졌으니 공유할 기억이 없다. 공유할 기억이 없으니 대화가 겉돈다. 서로 완전히 이질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명절은 가족들이 서로 이질적인 존재가 되어 같은 시대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확인하는 자리다. 어른의 자리에서 인자한 표정으로 던져주는 덕담은 아랫세대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 이해할 수 없는 말, 실천할 수도 없는 말, 듣기 싫은 말, 답을 할 수 없는 말들뿐이다. "말랐네, 밥 많이 먹어라", "시집 (장가) 가야지.", "취직해야지", "애 빨리 낳아야지", "애 하나로는 안 된다. 둘은 되어야지", "아들은 꼭 있어야 되는 데" 대답하기 싫은 만큼 세대 간의 간격도 그만큼 멀어지게 된다.
게다가 말이라고는 토속 사투리밖에 모르는 사람들이어서 아랫세대가 쓰는 말들은 알아들을 수도 없고, 은어인지, 약어인지, 외래어인지, 외국어인지, 토속어인지, 비속어인지, 암호인지, 표준말인지, 사투리인지조차 구분이 되질 않느다. 그렇다고 해서 분기탱천 고함지르며 나설 처지도 못된다. 따지고 보면 한글을 제쳐두고 한자를 숭배하다가 일제강점기 때는 일어로 말하고 읽었고, 해방 이후에는 영어만이 살길인 것처럼 만들어놓은 것도 그 세대들 아닌가?
사람이 불안을 일으키는 제일 큰 요인 중의 하나는 세상으로부터, 또 사람들로부터 외따로 떨어져 나왔다는 느낌이 들때이다. 어느 순간 내 몸이 머물고 있는 이 자리가 한없이 어색해지고, 사방에 펼쳐진 모든 것이 낯설고 생소하기만 하고, 그렇지만 어느 한편에도 기댈 수 있는 곳이 없을 때 사람들은 누구나 불안에 떨 수밖에 없다. 사방팔방이 절벽으로 둘러싸인 곳에 갇혀 있는 것 같고,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메아리조차 들리지 않을 때, 이 불안을 도대체 어찌 감당할 것인가? 누구든 나쓰메 소세키처럼 죽든지, 미치든지, 종교를 얻든지 중의 하나를 선택하지 않을까?
P 116
미국의 문화평론가 수전 손택은 멜랑콜리라는 정서에서 활기와 격정이란 매력을 빼고 나면 의기소침이 된다고 했다. "그다지 낭만적이지 않은 의기소침"이 요즘 의사들이 이야기하는 우울증인 셈이다.
사실 멜랑콜리라는 정서에 숨어있는 낭만적인 활기와 격정, 그리고 고독한 몽상의 세계에서 남이 쉽게 보지 못하는 것을 찾아내는 날카로운 시선은 예술과 철학의 창조성을 뒷받침하는 토대였기도 하다.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철학은 그의 멜랑콜리한 정서가 이루어낸 성과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멜랑콜리한 정서 즉 우울을 자신의 "가장 출실한 애인"이라고 하였고, "많은 사교 클럽의 친구들 외에 가장 절친한 친구"이기도 하고, 자신의 "내밀한 마음의 공간에 지진을 예감"하게 하는 정서였다.
P 118
도스토예프스키의 평전을 쓴 슈테판 츠바이크는 "도스토예프스키야말로 멜랑콜리한 정서 이면에 숨어있는 활기와 격정을 최고로 고양시켜 삶과 창작의 의지를 촉발시키고, 우수와 의기소침, 그리고 일상의 권태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특한 문학세계를 구축한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악마의 저주"라고도 하는 간질병을 앓으면서도 "뜨거운 피와 입가의 싸늘한 떨림을 가지고 삶과 죽음 사이의 예기치 못한 실존적 상황을 증명"한 유일한 작가라고.
P 119
한민족의 한의 정서를 연구해 온 한 의학자는 한에 대해 정의하기를 "한이란 역사적으로 나라를 잃고 고난을 수없이 겪었으며 정치적으로 억눌리고 경제적으로 가난한 상태로 억울한 처지에서 살아온 계층의 사람들의 마음 심층에 쌓이고 응어리진 감정이며, 또한 수백 년간 내려온 한국인의 감정적 문제의 초점이 되고 있는 것, 이는 약자의 욕망 억제, 패배의식, 좌절, 적개심, 허무감, 체념 등의 감정적 복합체, 또는 설움 덩어리로서 개인을 넘어 집안과 민족적으로 전승된느 것" 이라고 했다.
P 120
풀리지 않고 쌓인 한은 화가 되고. 그 화는 다시 몸의 이상을 불러온다. 한이 쌓이고 쌓여서 생긴 한국인 특유의 증상을 우리는 오랜 세월 홧병이라 불러왔고, 국제적 진단 기준에 따라 질병을 명명하고 분류하는 정신의학계에서도 '홧병'을 문화와 관련된 정신의학적 증후군으로 인정하고 있다.
화가 쌓이고 쌓여서 한이 되는 이유는 화를 불러오는 대상이 분명하지 않은데다, 대상이 특정된다고 하더라도 쉽게 접근하기 힘든, 힘을 가진 상대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한이란 권력이나 금력의 부당한 횡포나 전횡 탓에 억울한 피해를 당했음에도 거기에 대해 보상을 받기는 커녕 저항도 할 수 없고, 정당한 항의조차 할 수 없는 무기력함과 체념이 어우러진 정서이기도 하다. 달래 주지 않는 슬픔, 위로받지 못한 억울함, 나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과도 받지 못하는 부조리, 그런 슬픔과 억울함, 원망이 섞이고 맺히면서 응어리진 것이 한이 되는 것이다.
P 123
우울증은 별안간 찾아오고 증세는 느닷없이 드러난다. 그렇다기보다는 그렇게 보인다. 속으로 안으로 짓눌려 오던 것이 어느 한계에 도달함으로써 한 인간의 정신세계가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거나 한 인간의 에너지가 불타듯이 소진되면서 나타나는 것이므로 겉보기에는 느닷없이 찾아오는 증세처럼 보인다. 그런데 모른다.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 자신도,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을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도 그 사람이 오랜 시간 동안 무엇에 그렇게 짓눌리고 살았는지는 알지 못한다. 속은 문드러지고 있으면서도 겉모습은 쾌활하기 그지 없고 활력이 넘쳐흐르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에 연기를 해 왔던 건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죽음의 문을 두드리게 만드는 것이 우울증이다.
p 131
한국의 노인들은 은퇴 이후 자족할 수 있는 경제력이 없고 자족할 수 있는 능력도 없다. 그러므로 함부로 은퇴할 수가 없고 은퇴하더라도 이전에 해 왔던 일과는 다른 일이라도 닥치는 대로 해야 한다. 여전히 사회 속에 묶여서 젊은 층과 경쟁을 해야 하고, 생계를 위해서 멸시와 조롱을 감당해야 한다. 게다가 배우자와 사별한 경우에는 문제가 더 심각하다. 홀몸노인들의 빈곤도 심각한 문제이지만 그들의 고립과 고독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모든 생명체의 끝은 죽음이지만 그들의 끝만은 고독사라 부른다.
p 152
우리는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용된 토지 위에 건설된 대단지 아파트에 수용되어 관리비를 내면서 살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 늙고 병들게 되면 아파트를 떠나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으로 격리, 수용되어 쓸쓸하게 삶을 마감하게 될 것이다. 호모 가스트렌시스의 시대가 활짝 열리고 있는 것이다.
- 호모 카스트렌시스
이반 일리치가 산업사회의 주거문화를 비판하면서 사용한 용어이다. " 대부분의 사회에서 어디에 수용되는 것은 불행의 표식입니다. (중략) 산업사회는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을 입주자로 만들고자 하는 유일한 사회입니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늙고 병들면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요양병원에 수용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아무리 좋은 시설이라도 수용된 이상은 내 삶을 나의 자유의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서비스를 제공하는 수용기관에 의해 관리된느 삶을 살게 되며, 공동생활과 공동규칙을 강요받을 수 밖에 없다.
p170
이승을 떠나려는 사람에게 투입되는 의료처치는 아무리 경미한 것일지라도, 환자를 위한 지극히 순수한 목적의 시술이라 할지라도 떠나려는 사람의 발목을 잡는 쇠사슬이다. 고통스럽기 그지없는...... 환자였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의사인 나에게 남기고 간 가르침이다.
p 173
정진홍은 불쌍한 죽음이란 "죽음이 삶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라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한 채 살다가 자신의 죽음을 맞는" 것이며, 이는 "죽을 줄 모르고 살다 죽는 죽음" 이라 했다. 그러고 보면 이 시대의 죽음들이 하나같이 불쌍하다.
p 187
생명체라는 한자말을 풀어보면 하늘이 '살아'라고 내린 명령을 받은 몸 정도가 되겠다. '살아'라는 명을 받은 만큼 살아가는 동안 죽음에 대한 생명체의 공포와 거부 반응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본능적으로 몸에 각인되어 있는 것일 터이다. 신생아들만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조건반사는 위험으로부터 자기의 생명을 보존하려는 본능적 반응들인데, 이를 달리 표현하면 삶을 위협하는 위험을 직감으로 알아차리고 이를 거부하는 본능적인 몸짓이라고 할 수 있다. 반사행동과 함께 터져 나오는 울음소리는 어린 생명이 보여주는 삶의 의지 그 자체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나이가 들어 성인되면 죽음에 대한 공포는 점점 옅어진다. 우리는 지금 언제든지 죽을 수 있는 위험과 환경에 둘러싸여 있고 그런 위험에 노출된 인간의 몸은 유약하기 짝이 없지만, 한참 활동하고 일을 해야 할 나이에 죽음의 공포를 느끼면서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하고 사는 사람은 보기 어렵다. 삶과 죽음은 서로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관계이지만 누구든, 특히 젊을수록 죽음은 나와는 무관한 일인 듯 생각하고 살아간다. 죽음을 거부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죽음을 아예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갑자기 죽음의 공포를 몰고 오고, 권태롭기까지 한 일상을 한순간에 뒤엎어버리는 것이 암이다.
병원에서는 치료만 잘 받으면 살 수 있다는 희망을 던져주고, 스스로도 살아 보겠다는 의지를 불태우지만 희망과는 다르게 빠른 속도로 소진되어가는 몸과 버둥거리면서 싸우다가 결국에는 탈진하여 죽음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이 암이다. 어느날 갑자기 삶을 참 덧없게 만들어버리는 것이 암이라는 병이 가진 속성이기도 하다. 그래서 긴 투병생활 끝에 암에서 회복된 사람 중에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경우도 있다.
p 194
베이비부머 세대는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정부의 출산정책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세대들이어서 자녀들의 수가 그리 많지 않다. 하나 아니면 둘 뿐인 자녀들은 또 세계화, 국제화의 영향을 받고 자란 세대였고, 부모가 먼저 나서서 기러기 신세를 감수하면서까지 자녀들을 '글로벌화'된 세계인으로 키운 사람들도 있다. 따라서 베이비부머 세대의 자녀들은 전통적인 가족 공동체 또는 한솥밥 먹는 식구의 개념이나 가정의 질서를 받아들이기 거북해하고, 오히려 거추장스럽게 생각하는 세대들이다. 베이비부머 세대의 장성한 자녀들이 만들어가는 가족문화는 핵가족을 넘어 일인 가구로까지 바뀌고 있다. 그런 자녀들이 세월이 흐른 뒤에 늙고 병든 부모들과 함께 산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앞으로 1~20년의 세월이 더 흘러 지금의 베이비부머 세대들이 삶의 막바지에 다다랐을 무렵에는 부부가 한날한시에 같이 삶을 마감할 수 있는 사주를 타고났거나 동반자살을 하지 않는 이상 한 사람은 반드시 독거노인이 될 수 밖에 없다. 금슬이 아무리 좋은 부부였다 할지라도 남은 한 사람은 혼자 쓸쓸히 살다가 혼자 쓸쓸히 죽어갈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p 196
50~60대 연령층의 행복지수가 낮은 데에는 아무래도 경제적 요인이 제일 크게 작용할 것이다. 위로는 늙고 병든 부모를 부양해야 할 책임이 있고, 아래로는 7포 세대라는 자녀가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있는 형편인데, 자신은 이미 일터에서 밀려나왔거나 곧 밀려나올 처지이기 때문이다. 일을 하더라도 자아성취나 자아실현이니 하는 거창한 명분보다는 당장의 생계를 위해 거친 일터로 내몰리다시피 한 형편이니 일에 신명이 날 턱이 없다. "50대 자영업자가 꾸준히 증가"하는 한편 "부도 자영업자의 절반이 50대"라는 통계는 베이비부머 세대가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을 수치로 증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세대의 우울증과 자살율이 꾸준히 올라가는 것도, 그리고 범죄가 증가하는 것도 다 그런 이유일 것이다.
p 236
지금 병의원에서 치매라고 진단되어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거나 가정에서 보호를 받으며 치료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 정말 모두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들인가? 알츠하이머병을 확진한느 것은 사후 부검을 통해 뇌조직에서 몇몇 병리적 소견을 확인하는 길 이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 MRI와 같은 방사선 검사에서도 알츠하이머병을 특정할 수 있는 특이한 소견은 나오지 않고, 혈액이나 체액을 이용한 검사에서도 알츠하이머병이라고 특정할 만한 객관적 소견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체 훼손에 대한 거부정서가 강한 우리나라에서 학술적 목적 이외에 망자나 유족들에게는 아무 실익이 없는 부검을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기 때문에 사후에도 알츠하이머병으로 확진된 사례는 많지 않다.
그래서 치매 증상을 보이는 환자들은 대개 간이치매검사를 통해 알츠하이머병이 의심된다는 진단을 받고 있다. 그런데 치매검사법은 설문방식이다. 실지 치매를 비롯한 정신질환의 진단도구는 설문방식으로 구성된 것이 많다. 다른 신체 질환이나 장기에 뚜렷한 병변이 확인되는 질환과 달리 이들 질환은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검사방법이나 도구가 없기 때문이다. 최근 혈액검사로 알츠하이머병을 확진할 수 있는 검사방법이 개발되었다고 하지만 실지 진료현장에서 상용화되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상당기간 치매에 대해서는 환자의 병력과 함께, 의료진과 환자 사이의 설문방식이 가장 유용한 진단 방식이 될 수 밖에 없다.
P 248
망각의 효용에 대한 니체의 설명은 탁월하다. "일종의 능동적인, 엄밀한 의미에서의 적극적인 저지 능력"이며, 불쾌한 생각들이 우리의 의식에 떠오르지 않도록 "의식의 문과 창들을 일시적으로 닫는 것"으로 "마치 문지기처럼 정신적 질서와 안정, 예법을 관리하는 관리자의 효용"이란 것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망각의 효용이다. 따라서 "망각이 없다면 행복도, 명랑함도, 희망도, 자부심도, 현재도 있을 수 없다.
예상치 못했던 외상이 사람의 정신세계에서 망각이란 문지기를 제거해버린 것이 외상성 신경증이요,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이다. 이런 외상이란 "자극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장벽에 어떤 파열구가 생긴 것"으로 "유기체의 에너지 기능에 대규모의 혼란을 초래하고 가능한 모든 방어적 장치를 가동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라는 프로이트의 고전적 정의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리하여 "쾌락의 원칙이 중지되는 한편 다량의 자극이 범람하는 사태에서 정신기관을 더 이상 보호해줄 수 없는 상태"가 바로 외상성 신경증이다.
P 252
컬럼비아대학 예술사 고고학부 교수인 조너선 크레리는 그의 저서에서 "신경과학과 제휴한 제약산업은 예전에는 불필요했던 제품을 위한 거대한 새 시장을 창조할 목적으로 갈수록 많은 감정상태를 병적인 것으로 제시하여 왔다"면서 "수줍음, 불안, 가변적 성욕, 주의산만, 슬픔 등의 관념으로 부정확하게만 암시되는 인간의 정서와 감정의 변화가, 거대한 이윤을 안겨주는 약물이 공략해야 할 의학적 장애로 그릇되게 변환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확실한 의학적 근거는 아직 없는 것 같다.
P 276
집단의 관행과 인습에 젖어 사는 삶의 속모습을 융은 아래와 같이 진단한다.
각 개인은 집단 속에 있을 때 어떤 의미에서는 혼자 있을 때보다 무의식적으로 더 나쁜 사람일 수 있다. 각 개인은 집단에 떠맡겨져 있으므로 그만큼 자기의 개인적 책임을 면제받기 때문이다. 훌륭한 사람들이 모인 큰 단체는 도덕성과 지능의 측면에서는 우둔하고 포악한 짐승을 닮은 경우가 있다. 조직이 크면 클수록 그 조직의 부도덕성이나 맹몽적 우둔함을 피할 수 없게 된다.
P 282
칼 수구스타프 융이 지적하는 비뚤어진 문명인이란 "공적으로 보증되지 않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어서 영적인 세계와는 대화를 나눌 수도 없고, 산, 바다, 하늘, 땅, 강, 바람, 구름, 나무, 새와 온갖 꽃들이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도 없다. 그래서 어떤 길을 가야 할 지 넋을 잃은 채 얼이 빠진 채 비틀거리고 있는 것이 바로 '비뚤어진 문명인'인 우리들의, 결코 행복하지도 못하고 건강하지도 못한 삶의 모습 아니겠는가?
이제는 이름 석 자 '손석희' 그대로 언론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손석희 라는 말에는 신뢰라는 단어가 실과 바늘처럼 자연스럽게 따라 붙는다. 그리고 1956년 생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정도의 동안을 유지하는 '손석희', 어찌 그가 궁금하지 않겠는가? 예전부터 그와 관련된 책이 있는지 찾아보았으나 쉽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언론비평과 인물비평에 탁월한 '강준만' 교수의 『손석희 현상』 이라는 책을 발견하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나는 언론인 '손석희'를 직접 본 적이 있다. 아마 12년 정도 전인 걸로 기억한다. 그가 내가 다니는 대학에 특강을 온적이 있었다. 장소 자체가 많은 인원을 채울 수 있는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수 많은 학생들이 계단에도 모두 앉고, 자리를 찾지 못한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서서 그의 특강을 들었다. 그 당시에도 이미 그는 가장 신뢰받는 언론인이었다. 그 때의 특강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렴풋한 기억이 하나가 있다. 누군가 질문을 했다. "혹시 나중에 정치 쪽으로 관심이 있으십니까?" 그 때 그의 대답은 "자신은 정치라는 것이 언론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희미해지는 옛 기억이라 이런 말이었는지 정확하지는 않으나, 예전에 홍준표 의원이 손석희 앵커에게 정치를 할 거냐고 묻는 질문에 그럼 "소는 누가 키우냐?" 라고 재치있게 대답한 것과 비슷한 말이 아니었을까.
2013년, 손석희는 JTBC 보도총괄 사장이라는 직책을 맡으며 종편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 당시에 수 많은 사람들과 지식인들이 그에게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으며, 왜 그가 그곳을 향하게 되었는지 궁금했었다. 그리고 과연 그가 삼성과 관련된 보도를 객관적으로 보도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주목했다. 그리고 손석희는 <JTBC 뉴스룸> 을 통해서 다시 앵커의 자리로 돌아왔다. 그의 뉴스는 달랐다. 아마도 그가 지금까지 언론인으로서 살아오면서 생각했던 많은 점들을 그곳에 녹여놓은 게 아닐까.
박성호 : 그래서 텔레비전 뉴스가 시청자들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겠군요.
손석희 : 네, 텔레비전 뉴스가 어떻게 변화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제가 요즘 뉴스를 분석적으로 보지 않아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런 건 있을 것 같아요. 흔히 얘기하는 것처럼 스토리만 있고 히스토리가 없고 텍스트는 있는데 콘텍스트는 없고. 그게 가장 뼈아픈 게 아닐까요. 그러니까 계속 쫓아가면서 현상에 대해 보도는 하지만 그에 대해서 콘텍스트를 시청자들이 모르고 히스토리를 알 수가 없다면 시청자가 그 뉴스에 대해 깊이 알기도 어렵고 평가도 할 수 없어요. 그런데 텔레비전 뉴스는 여전히 백화점식 보도, 1분 30초짜리 보도거든요. 거기에 무슨 히스토리가 있고 콘텍스트가 살아남겠어요? 스토리와 텍스트만 살아남는 것이지. 현재 텔레비전 뉴스는 낮에 다 본 걸 화면과 기자 목소리로만 전달하는 것뿐이잖아요. 볼 필요가 없어진단 이야기지요. 더군다나 젊은 세대들이 TV에서 멀어지는 이유는 자기가 선택한 뉴스도 아니고, 자기는 디지털 기기에 익숙하기 때문에 콘텍스트나 히스토리에 대해서도 인터넷뿐만 아니라 SNS를 통해서도 다 알고 있기 때문이죠. 그러 그냥 1분 30초 동안 보도해주는 것에 대해서 무슨 매력을 느끼겠어요. 안 느끼지. 그럼 안 보는 겁니다. 그런 데서 오는 약점 아닐까요?
- <손석희 현상> 中, p116 -
손석희는 2015년 9월 21일 서울 동대문플라자에서 열린 중앙 미디어네트워크 창립 50부년을 기념하는 '중앙 미디어 콘퍼런스'에서 행한 '뉴스룸의 변화' 를 주제로 한 연설에서도 '어젠다 키핑'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모든 정보가 빠르게 소비되는 미디어 시장에서 언론사가 해야 할 일은 많은 정보 가운데서 중요한 정보를 고르고 이에 대해 꾸준히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손석희는 어젠다 키핑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로 '소비자'를 꼽았다. 초기에 뉴스 소비자들은 단순히 '뉴스를 보는 존재였다면 지금은 오히려 정보를 제공하는 존재'로 탈바꿈했다는 것이다. 그는 "미디어가 지속적으로 화두를 던지면 시청자들은 이를 서로 주고받으면서 네트워킹을 하게 된다"며 "이것이 JTBC 뉴스룸이 지향하는 것" 이라고 말했다. 그는 "때로는 지루하다는 인식도 있어서 반성하고 있다. 물론 손해 보는 상황도 발생한다. 시장에서 손해는 시청률이 떨어진다는 것"이라면서도 "그럼에도 디지털 시대에 필요한 것은 어젠다 키핑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이 빨리 바뀐다고 해도 저널리즘이 미래적 가치로 지켜야 할 것이 어젠다 키핑"이라고 말했다.
- <손석희 현상> 中, p190 -
그는 지금의 뉴스 형식과 내용에 대해서 무언가 부족함을 느꼈다. 세상은 변해가고, 수 많은 매체의 등장과 변화를 통해 뉴스 소비자들의 소비방식은 변해가는데 뉴스는 그것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스토리에서 히스토리로, 텍스트에서 콘텍스트로, 빠르게 소비되고 잊혀지는 기사가 아닌 지속적인 화두제시로 기존의 방식과 차별화된 방식의 뉴스를 선보였다. 그리고 그 새로움은 대중에게 통했다.
나 역시 <JTBC 뉴스룸> 2부에 시작하는 앵커브리핑을 따로 모아서 보기도 했으며, 엔딩곡을 찾아보기도 했다. 그는 딱딱한 뉴스에 사람 냄새를 진하게 묻어나게 했다. 그리고 우리가 다른 인터뷰에서 쉽게 보기 힘든 유명인들도 그에게 선뜻 시간을 내주며 팬이기를 자처하기도 한다. 차가운 시선으로 뉴스를 진행하는 동시에 사람에게는 지극히 따뜻한 모습을 보여주는 그이기에 인터뷰를 꺼리는 사람들, 그리고 뉴스를 외면했던 이들이 그가 진행하는 뉴스로 향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그가 진행하는 앵커브리핑에서 몇 번이나 울컥했나 모른다.
작년 11월 어느 날의 앵커 브리핑이다.
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단원고 기억교실.
고등학교 2학년에서 멈춰야 했던 그 교실이 안산 교육청 건물로 임시 이전해
문을 열었습니다.
교실엔 오늘도 수업이 진행되는 양 온기가 느껴지고 책상위엔 소소한 낙서의 흔적이 남아있군요.
또래 친구들은 작년에 수능을 보았을 테고 재수를 한 친구들은 며칠 전 수능을 마쳤을 테지요.
그리고 ... 김관홍 잠수사.
세월호의 민간잠수사였다가 몸과 마음을 다쳤고 지금은 저세상으로 가버린 사람.
차가운 바지선 위에서 담요 한 장에 의지해 잠을 잤고
바다 속 깊은 곳에서 아이들을 두 팔로 끌어안고 나왔던 사람.
잠수사가 마지막으로 세상에 남긴 말은
"뒷일을 부탁합니다" 였습니다.
대통령이 7시간 동안 어디서 무엇을 했는가는 우리에게 왜 중요한가.
변호인이 이야기한 '여성의 사생활' ...
우리는 그것이 궁금하지 않습니다.
대통령은 사사로운 모든 관계를 끊고, 가족을 만나지 않고, 1분 1초도 쉬지 않고 일한다 했지만...
오히려 개인의 사생활과 사사로운 친분관계, 이것은 대통령이라고 해도 결코 예외가 아닌
누구나 마땅히 누려야 할 것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행복한 대통령이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 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은 17살의 아이들이 기울어져가는 그 배에서
그저 '가만히 있으라'는 말만 듣고 있어야 했던 그 시간에,
비록 컨트롤 타워가 아니라는 강변이 나왔지만 그래도 무엇인가를 했어야만 했던
그곳에서 어떤 일이 진행되고 있었는지를 궁금해 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잊지 않으려 오늘도 질문합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뒷일을 부탁'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
나는 한국 사회에서 삼십대 중반의 나이로 살아가는 한 사람이다.
이제는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을 키우며, 다니는 회사에 선배 뿐만 아니라 후배도 하나 둘씩 점점 늘어나고 있다.
과연 나는 아이들과 후배에게 어떤 아빠, 선배인지 모르겠으나,
항상 누군가를 보고 나도 조금씩 닮아가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지금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 사회에서 그런 분이 이제는 한 명은 분명히 생겼다는 것에 대해 고맙다.
자신이 선택한 분야에 대한 굳은, 곧은 의지와 변함없는 신념,
그리고 언론인으로서 항상 중립을 유지하며 흔들리지 않는 자세,
집요하고 불합리한 것에 대해서 냉정해 보이지만,
사람을 대할 때는 누구보다도 따뜻해보이는 모습.
어떻게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한 번 나도 곰곰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20년 뒤, 30년 뒤의 나는 과연 어떠할까. 조금씩 이렇게 배우다 보면, 그리고 행동으로 옮기다 보면,
조금씩 나아지겠지......
P116
박성호: 텔레비전 뉴스의 위기라고들 말합니다. SNS 와 비교하면 속보성도 떨어지고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과 비교해도 이슈를 다루는 기동성도 떨어지고요.
손석희 : 기본적으로 텔레비전이 옛날처럼 막강한 영향력을 간 째는 지났잖아요. 뉴미디어가 출현하면서 당연한 현상일 수도 있고, 과거로부터 모든 뉴미디어가 출현하면 기존 미디어들은 일정 부분 타격을 입었던 게 사실이고요. 심지어는 망한다고까지 했죠. 텔레비전이 나왔을 때 영화가 모두 망할거라고 했어요. 그래서 만들어낸 게 70mm 대형 영화,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였고 그렇게 해서 살아남았죠. 그런데 방송 중에서도 가장 올드 미디어인 라디오 같은 경우 여태까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를 생각해보자고요. 라디오가 갖는 특성을 살려냈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이죠. 텔레비전은 아까 말했던 것처럼 변한 게 없다고 했는데 이렇게 변화가 없는 것은 매우 심각한 상황입니다.
박성호 : 그래서 텔레비전 뉴스가 시청자들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겠군요.
손석희 : 네, 텔레비전 뉴스가 어떻게 변화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제가 요즘 뉴스를 분석적으로 보지 않아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런 건 있을 것 같아요. 흔히 얘기하는 것처럼 스토리만 있고 히스토리가 없고 텍스트는 있는데 콘텍스트는 없고. 그게 가장 뼈아픈 게 아닐까요. 그러니까 계속 쫓아가면서 현상에 대해 보도는 하지만 그에 대해서 콘텍스트를 시청자들이 모르고 히스토리를 알 수가 없다면 시청자가 그 뉴스에 대해 깊이 알기도 어렵고 평가도 할 수 없어요. 그런데 텔레비전 뉴스는 여전히 백화점식 보도, 1분 30초짜리 보도거든요. 거기에 무슨 히스토리가 있고 콘텍스트가 살아남겠어요? 스토리와 텍스트만 살아남는 것이지. 현재 텔레비전 뉴스는 낮에 다 본 걸 화면과 기자 목소리로만 전달하는 것뿐이잖아요. 볼 필요가 없어진단 이야기지요. 더군다나 젊은 세대들이 TV에서 멀어지는 이유는 자기가 선택한 뉴스도 아니고, 자기는 디지털 기기에 익숙하기 때문에 콘텍스트나 히스토리에 대해서도 인터넷뿐만 아니라 SNS를 통해서도 다 알고 있기 때문이죠. 그러 그냥 1분 30초 동안 보도해주는 것에 대해서 무슨 매력을 느끼겠어요. 안 느끼지. 그럼 안 보는 겁니다. 그런 데서 오는 약점 아닐까요?
박성호 : 방법이 없을까요?
손석희 : 인터넷을 보자고요. 인터넷도 가만히 보면 때로는 스토리와 텍스트만 남아 있을 때도 있어요. 한 가지 예를 들면 내가 출연자와 논쟁적인 인터뷰를 했을 때 그걸 직접 들은 사람과 인터넷 기사를 통해 접한 사람은 반응이 하늘과 땅 차이죠. 인터넷을 보고 반응하는 사람은 오해를 한다고요. 그렇잖아요? 뉴미디어라는 인터넷도 그 정도의 약점은 있어요. 그리고 히스토리로 찾아보려면 한참 뒤져봐야 하는 것이죠. 그 기기 device에 약한 사람은 접근하기도 어렵고. 내가 보기엔 그런 부분을 현재 텔레비전 뉴스는 낮에 다 본걸 화면과 기자 목소리로만 전달하는 것 뿐이잖아요. 볼 필요가 없어진 단 이야기지요. 텔레비전에서 해줘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텔레비전은 큰 조직을 갖고 있고 취재 인원도 많은 뿐더러 다양한 아카이브를 가지고 있잖아요.
박성호 : 방송 뉴스의 내용 면에서 봐도 시청자들이 알고 싶은 걸 다룬다기 보다 뉴스 공급자들로부터 쏟아지는 뉴스들을 실어 나른다는 느낌을 받거든요.
손석희 : 그건 예전하고 똑같아요. 출입처 제도라는 취재 시스템이 바뀌지 않으니까. 각 부장들이 출입처의 기자들을 관장하니 편집 회의에 아이템을 낼 때도 출입처 기준으로 반영이 되고, 아주 원론적인 문제이면서도 굉장히 중요한 문제라고 봐요. 백화점식 나열 뉴스를 깨려면 출입처를 허물어뜨려야 하는데, 그걸 깰 수 있을지...
박성호 : 제가 1년간 영국에서 모니터를 해보니 'BBC 뉴스는 맥락을 제공하는 뉴스' 였습니다. 교수님도 우리 뉴스에 콘텍스트가 없다고 하셨는데, 뉴스의 내용 면에서는 어떤 걸 지향해야 할까요?
손석희 : 난 인터넷 댓글 뉴스를 보면 답이 상당 부분 나와 잇다고 봐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인터넷 뉴스에서 댓글 많은 뉴스는 원칙적으로 편집자들이 임의로 뽑은 주요 뉴스가 아니라 댓글 많은 뉴스가 올라갑니다. 그런데 그 뉴스에는 물론 쓸데 없는 정크 인포메이션도 있어요. 연예 관련 소식이 많이 있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엔 굉장히 논쟁적인 뉴스들이 올라갑니다. 그럴 수밖에 없죠. 나는 그런 것들도 텔레비전 뉴스에서 응용할 필요가 있다고 봐요. 그 서른 몇 개의 아이템을 낼 게 아니라 아이템 수를 대폭 줄이더라도 우리가 어떤 부분이 논쟁적이고 댓글이 많다는 것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것이니 그 부분에 좀더 많은 취재 인력과 편집시간을 배당해주면 그게 나은 것 아닌가요? 그건 뉴스의 본령에도 맞아요. 우리가 이야기한 콘텍스트든 스토리든 모두 담을 수 있다고요. 또 시장성에도 맞아요. 사람들이 모두 관심을 보이니까 그게 요즘 대중들의 욕구잖아요. 내가 뉴스를 봐도 20분, 30분 넘어가면 별로 볼 게 없어요. 뉴스 소비하는 사람들은 대개 비슷한 생각들일 겁니다. 그 뒤의 뉴스는 다른 프로그램에서 다뤄도 되는 부분이죠. 굳이 왜 하려고 하냐고요. 왜 1분 30초식 서른 몇 개를 고집하느냐 말입니다.
박성호 : 더 세부적인 이야기를 하죠. 형식과 내용의 변화도 중요하지만, 기자 리포트의 스토리텔링 방식, 기사 작성의 관습도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요?
손석희 : 그게 여태까지 한 번도 바뀌지 않았어요. 미안한 이야기인데, 제가 입사했을 때랑 지금의 리포트 기사 스타일이 차이가 없어요. 한 가지 예를 들어 이야기하자면, 제가 태풍 올라오고 삼풍백화점 무너지고 할 때처럼 뉴스 특보를 많이 했었는데, 그때 느꼈던 게 뭐냐 하면 이런 겁니다. 한강변에 기자가 나가 있다고 쳐봐요. 그럼 하루 종일 한강 수위 센티미터 숫자만 바뀌고 문장이 똑같아요. 앵커 입장에서는 하루 종일 들으면 외워요. 그 친구가 말한 걸 다 외운다고요. 시간대별로 한강 수위가 몇 미터 몇십 센티미터인지만 바뀌었어요. 그것만 갈아 끼우는 겁니다. 취재를 그것만 하는 거죠. 진행하면서 느낀 것은 그런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굉장히 많은 취재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혼잔 나가서 중계차 타고 센티미터만 보고 있다고요. 거기에서 무슨 새로운 뉴스가 나오겠어요. 시청자들은 하루 종일 똑같은 이야기만 듣고 있는 거죠. 의미가 없어요. 기자의 방송 능력도 안 늘고요. 한편으론 기자들의 방송 능력도 가둬둔 결과이기도 합니다. 그것도 시스템의 문제인 것 같아요. 생각해봐요. 매일같이 출입처에서 나오는 자료 보고 그 바탕 위에서 보강 취재하는 데 익숙해지면 자기가 주도적으로 하는 게 아니잖아요. 너무 심하게 이야기해서 미안한데, 그런 데 익숙해진 기자의 경우 자율적 취재 기능이 상당 부분 떨어져 있다고 봐요.
p 73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건 모두 '선택'인 거죠. 실수란 선택을 잘못 한 것이고요. 그럼 실수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잘못한 선택이 아니라고 생각해야죠. 전 그래서 제가 간 길에 대해 실수란 표현을 잘 쓰지 않아요. 일종의 자기 합리화인데, 제 자신을 평가하는 덴 융통성이 있어야 한다고 보거든요.
p 78
방송을 시민사회에 돌려주자. 가칭 '방송의회'를 구성하자. 방송위원회 위원과 공영방송사 사장에 대한 인사권을 방송의회에 넘겨주자. 행여 돈 걱정 할 필요는 없다. 방송의회를 구성하는 방송 의원은 교통비조차 받지 않는 완전 무보수 명예직이다. 방송 의원들은 방송위원회 위원 및 방송사 사장 등을 선출하는 투표권만 행사하면 된다. 선출 후 중대 사안에 국한하여 결정을 내리는 추가 투표도 있을 수 있겠다.
방송 의원 규모는 사회 각계를 대표하고 외부 압력과 로비를 거의 무의미한 수준으로 만들 수 있게끔 수천 명으로 하자. 선출은 완전 자유경쟁 공모제로 하자. 후보자들은 수천 명의 방송 의원 앞에서 자신의 비전과 소견을 역설해 본격적인 검증을 받도록 하자. 공정성 안전 장치도 그런 검증 과정을 통해 마련하도록 하자.
기존 시스템과 비교하여 방송의회에 문제가 없을 리 없다. 적잖은 부작용도 있으리라. 그러나 지금처럼 정치권의 정략적 갈라먹기 싸움에 늘 이전투구로 전락하곤 하는 공정성 갈등을 유발하는 기존 방식보다는 더 나을 것이다. 선출만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일 뿐 방송이 국가 체계상의 한 부분으로 가능하게끔 하는 기존 시스템은 그대로 가져가는 만큼 '독립'에 대해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방송의회는 한국 시민사회의 수준을 반영할 것이다 .그 수준이 낮아 문제가 되는 건 감수하자. 지금 우리가 현 시스템에 대해 분노하는 건 그것이 한국 사회 전반의 수준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고 보기 때문이 아닌가.
방송의회 구성은 기존 법과 제도를 상당 부분 바꿔야 하는 일인 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연구 검토해보되 그 취지와 의미만큼은 지금 당장 받아들이자. 방송계를 눈만 뜨면 싸움질하기에 바쁜 정치권의 대리 전쟁터로 만들거나 볼모로 잡아두는 건 우리 모두의 자학이다. 다른 정부 유관 기관들도 이런 인사 방식을 원용하자. 이런 식으로 우리 사회의 중립적 영역을 넓혀가지 않는 한 한국은 내부 당파 싸움에 역량을 소진시켜 주저앉고 말 것이다.
p 91
"미국에 있을 때 <손석희의 미국탐험>이라는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당시 전직 방송기자 출신인 시민운동가를 만났는데, '왜 기자를 그만두고 시민운동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분이 '기자는 양쪽 입장의 균형과 객관성을 유지해야 하는데, 한쪽의 입장을 견지하고 싶은 때가 많았다. 기자를 그만두고 시민운동을 하는 것은 내가 지지하는 입장을 표명하기 위해서다.' 저 역시 그 사람이 말한 것처럼 방송인으로 있는 한 균형 감각과 객관성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생각한다.
p 104
정관용은 "지금 우리 사회에는 신념이 과도하게 넘친다"고 개탄한다. "그런데 모두 당파적 신념들이어서 문제이다. 의심의 자세가 부족하다. 이쪽이냐 저쪽이냐, 우리 편이냐 아니냐를 먼저 묻고 가른 다음 같은 쪽이면 그가 어떤 행동을 하든, 어떤 주장을 펴든 일단 맹신한다. 왜 그런지, 맞는지 틀린지조차 따지지 않는다. 반대로 다른 편이 펴는 주장이나 행동은 일단 부정하고 본다. 그의 주장과 행동에 어떤 근거가 있는지 헤아리지 않는다. 그의 논리가 아니라 나만의 방식으로 판단한다. 이것이 '편'의 논리, 진영 논리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사실 한국 사회에서 '신념'이나 '확신'이란 말이 좋은 의미로 쓰이는 것도 문제다.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던 시절엔 확신은 물론 '광신'마저 투쟁의 동력으로 필요했고 긍정 평가할 수 있었겠지만,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체제하에선, 게다가 사회적 갈등과 분열이 극심한 상황에선, 그 어느 쪽을 막론하고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확신이다. 확신은 나의 확신을 공유하지 못하는 사람을 적으로 돌리는 '잔인한 사고방식'이기 때문이다.
p 117
네, 텔레비전 뉴스가 어떻게 변화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제가 요즘 뉴스를 분석적으로 보지 않아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런 건 있을 것 같아요. 흔히 얘기하는 것처럼 스토리만 있고 히스토리가 없고 텍스트는 있는데 콘텍스트는 없고, 그게 가장 뼈아픈 게 아닐까요. 그러니까 계속 쫓아가면서 현상에 대해 보도는 하지만 그에 대해 콘텍스트는 시청자들이 모르고 히스토리를 알 수가 없다면 시청자가 그 뉴스에 대해 깊이 알기도 어렵고 평가도 할 수 없어요. 그런데 텔레비전 뉴스는 여전히 백화점식 보도, 1분 30초짜리 보도거든요. 저기에 무슨 히스토리가 있고 콘텍스트가 살아남겠어요? 스토리와 텍스트만 살아남는 것이지. 현재 텔레비전 뉴스는 낮에 다 본 걸 화면과 기자 목소리로만 전달하는 것뿐이잖아요. 볼 필요가 없어진단 이야기지요. 더군다가 젊은 세대들이 tv에서 멀어지는 이유는 자기가 선택한 뉴스도 아니고, 자기는 디지털 기기에 익숙하기 때문에 콘텍스트나 히스토리에 대해서도 인터넷 뿐만 아니라 SNS를 통해서도 다 알고 있기 때문이죠. 그럼 그냥 1분 30초 동안 보도해주는 것에 대해서 매력을 느끼겠어요. 안 느끼지. 그럼 안 보는 겁니다. 그런 데서 오는 약점 아닐까요?
P 124
기본적으로 뉴스 앵커 때 하고 비슷한 입장이긴 한데, 나는 내 의견은 그렇게 내밀지 않아요. 내가 예전에 타사의 아침 시사 프로그램 진행자들 만나서 이야기 들어보면 새벽 3~4시에 나온대요. '아니 왜 그렇게 일찍 나오냐' 고 했더니, 나와서 오프닝과 클로징을 서야 한다고 해요. MBC도 아침 8시 라디오 진행하는 뉴스 앵커들이 일찍 나와서 오프닝, 클로징 멘트 멋있게 준비하잖아요. 그래서 내가 농담으로 그랬어요. '그러면 죽습니다. 사람이 좀 자야지' 난 일찍 안 나와요. 방송 45분 전에 나와요. 그 기본적인 이유는 그런 데다 시간이나 정력을 쓸 게 아니고 인터뷰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한마디라도 더 물어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서예요. 내가 클로징 멘트를 못하고 끝내는 경우도 종종 있어요.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광고 끝나고 타이틀 나가는 경우도 있어요. 그건 1분이라도 좋은 질문에 쓰는 게 낫지, 내가 뭐 나서서 내 말을 전해준다는 것은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문제가 있지 않을까 싶어요. 우리나라 시사프로그램 진행자는 어쩔 수 없이 균형을 추구하는 수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가능하면 콘텐츠로 채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어떤 진행자의 주관이나 콘텐츠와 상관없는 스타일에 있어서 차별화시키려는 노력은 내가 좀 해보진 않은 것 같아요.
P 134
왜 JTBC 일까? JTBC가 개국 당시부터 손석희 영입에 공을 들인 것은 방송가에서 나름 알려진 이야기였다. 그도 영입 제안은 어래전부터 받았고, 고민도 오래 했다고 말했다. "언론이라는 게 사회통합 기능이 있어야 된다고 하는데, 현실이 그렇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그걸 한번 실천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다. 그래서 딱 JTBC만이 최적의 여건이라고 얘기할 수 없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 도전해볼 수는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P 135
2013년 5월 13일 손석희 JTBC 신임 보도담당 사장으로서 첫 공식 일정을 소화했다. 그는 보도국 기자들과의 첫 회의에서 "균형, 공정, 품위, 팩트를 4대 가치로 한 방송 뉴스를 만들겠다" 고 밝혔다.
P 190
손석희는 2015년 9월 21일 서울 동대문플라자에서 열린 중앙 미디어네트워크 창립 50부년을 기념하는 '중앙 미디어 콘퍼런스'에서 행한 '뉴스룸의 변화' 를 주제로 한 연설에서도 '어젠다 키핑'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모든 정보가 빠르게 소비되는 미디어 시장에서 언론사가 해야 할 일은 많은 정보 가운데서 중요한 정보를 고르고 이에 대해 꾸준히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손석희는 어젠다 키핑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로 '소비자'를 꼽았다. 초기에 뉴스 소비자들은 단순히 '뉴스를 보는 존재였다면 지금은 오히려 정보를 제공하는 존재'로 탈바꿈했다는 것이다. 그는 "미디어가 지속적으로 화두를 던지면 시청자들은 이를 서로 주고받으면서 네트워킹을 하게 된다"며 "이것이 JTBC 뉴스룸이 지향하는 것" 이라고 말했다. 그는 "때로는 지루하다는 인식도 있어서 반성하고 있다. 물론 손해 보는 상황도 발생한다. 시장에서 손해는 시청률이 떨어진다는 것"이라면서도 "그럼에도 디지털 시대에 필요한 것은 어젠다 키핑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이 빨리 바뀐다고 해도 저널리즘이 미래적 가치로 지켜야 할 것이 어젠다 키핑"이라고 말했다.
P 203
전근대, 근대, 탈근대적 요소가 동시에 공존하는 한국 사회의 독특한 '비동시성의 동시성'에 대해 말했듯이, 1970년대 의식에 찌들어 있는 사람들과 2010년대를 같이 살아가야 하는 건 웃기는 일인 동시에 피곤한 일인 것 같다.
P 243
손석희의 저널리즘적 의미는 이론과 실천 사이에 존재하는 엄청난 괴리를 돌파해냈다는 점에도 있다는 걸 강조하고 싶다. 저널리즘 학자가 강단에서 저널리즘의 바람직한 방향과 내용에 대해 말하기는 쉽다. 그 누구도 실천을 요구하지 않는 학자로서 특권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실천은 전혀 다른 세계다. 그런데 손석희는 그 두 세계를 연결하는 데에 적잖은 성공을 거두었으니, 이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니랴.
P 278
의제설정 권한은 언론의 존재 근거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언론엔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의제설정을 어떻게 얼마나 하느냐에 따라 언론의 영향력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선 캠페인을 분석한 저서를 여러 권 낸 바 있는 정치 전문 저널리스트인 시어도어 화이는 언론의 의제설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국에서 언론의 위력은 대단한 것이다. 그것은 공중 토론의 의제를 제공하며, 이 대단한 정치적 힘은 어떤 법률에 의해서도 방해받지 않는다. 언론은 사람들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생각할 것인가를 결정한다. 그것은 다른 나라에서는 독재자, 성직자, 정당, 정당 총재에게나 부여될 수 있는 권한이다."
언론이 특정 이슈들을 강조하거나 부각함으로써 수용자들로 하여금 그러한 이슈들을 중요하게 인식하도록 만드는 효과 또는 기능을 가리켜 '의제설정 기능'이라고 한다. 즉, 언론이 수용자들에게 '어떻게 생각하도록' 하기 보다는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하도록' 이끈 다는 것이다.
P 280
진보 진영은 보수 언론을 바보로 안다. 보수 언론은 늘 '진보 죽이기'를 절대적 사명으로 삼고 있다는 식의 발상을 한다. 미련한 생각이다. 그렇게 해서 장사를 할 수 있을까? 보수 언론엔 이념과 노선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상업적 생존과 성장'이라는 걸 꿈에서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가?
대학 신입생들이 1학년 1학기에 읽는 언론학 개론서만 보아도 훤히 알 수 있는 사실을 그들은 애써 외면한 채 보수 언론의 비판을 무조건 자기 면죄부로 삼으려 들다가 골병이 들고 말았다. 보수 언론이 이들을 골탕 먹이는 건 간단하다. 옳건 그르건 민심을 좀 꿰뚫어보는 주장을 해대면 뭐든지 보수 언론의 반대로 하겠다는 사람들이 갈 길은 뻔하지 않은가 말이다.
보수 언론에 대해 '프레임' 이라는 어려운 말까지 써가면서 제법 고급스럽게 분석하는 이도 많다. 일리 있는 주장이지만, 본말전도의 위험이 있다. 아니 '위험'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일이다. 프레임이란 무엇인가? 보도와 논평의 틀을 말한다. 사진을 찍을 때 자신이 선택하는 프레임을 떠올리면 되겠다. 똑같은 풍경이지만 사진을 찍는 사람이 어떤 프레임으로 접근하느냐에 따라 사진이 갖는 의미는 각기 달라질 수 있는 것처럼, 똑같은 내용이라도 어떤 관점에서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반응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프레임은 보수 언론은 물론 진보 언론에도 존재한다. 문제는 힘의 격차다. 진보는 늘 보수의 프레임이 어떻다는 식의 말을 하지만, 보수는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강자는 약자의 프레임에 시비를 걸지 않는 법이다. 진보가 보수의 프레임을 잘 살펴보면서 휘말려들지 않기 위해 조심하는 건 꼭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진보는 그 필요성을 오 남용해왔다. 과대평가의 수준을 넘어 뻥튀기라고나 할까? 진보 진영의 문제를 자신들의 문제로 알고 답을 안에서 찾으려는 게 아니라 모든 걸 보수 프레임 탓으로 돌린다. 이점에서 나는 프레임 이론이 한국의 진보 진영에 엄청난 악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진보의 악습 중의 하나인 '남탓'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프레임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인 '뉴스 가치'의 문제다. 시장에서 어떤 뉴스가 더 잘 팔릴까? 보수 언론도 진보적 뉴스가 잘 팔리는 상황이면 진보적 뉴스를 생산하게 되어 있다. 이게 이념에 앞서는 시장의 철칙이다. 보수 언론은 이처럼 유동적이고 신축적인데, 왜 진보 진영은 보수 언론을 불변의 법칙과 같은 틀로 이해하고 재단하는가?
이젠 '보수 프레임' 탓 그만하고, "장사를 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싸움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서 배를 채우려 드는 하이에나 근성"에 대한 이해를 제대로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일부 극우파는 그런 근성의 발휘를 가리켜 '언론의 난'이라고 하지만, 그게 '난'이라면 그들이 숭배하는 미국은 '언론의 난'이 상시적으로 일어나는 나라라는 건 알고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아니 극우파 이야기 할 것 없다. 나의 평소 지론이지만, 진보의 가장 큰 문제는 보수의 머리를 과소 평가하는 것이다. 그런 실속 없는 오만은 버리는 게 좋다.
나는 어떤 국가를 원하는가? 내가 바라는 국가는 사람들 사이에 정의를 수립하는 국가이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는 국가이다. 국민을 국민이기 이전에 인간으로 존중하는 국가이다. 부당한 특권과 반칙을 용납하거나 방관하지 않으며 선한 시민 한 사람이라도 절망 속에 내버려두지 않는 국가이다. 나는 그런 국가에서 살고 싶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나는, 소로가 말한 것처럼 "먼저 인간이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시민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런 국가를 만들 수 있고, 또 그런 나라에서 살 합당한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
'국가란 무엇인가' 라는 제목 아래에 적혀있는 문구다. 이렇게 국가에 대한 글귀가 생활 속으로 들어오게 될 줄은 몰랐다. 우선 나 자신에게 먼저 물어보자. 국가란 지금까지 나에게 무엇이었는가? 지금까지 국가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런데 잠시 생각해보니 국가는 나에게 '공기' 같은 것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공기라는 것에 감사하면서 살지 않았다. 공기는 당연히 존재하는 것이니 어떤 생각을 할 여지 자체가 없었다. 국가도 그랬나 보다. 삽십 여 년을 살아오면서 내가 직접적으로 국가의 공권력에 피해를 입거나 반대로 무언가 혜택을 입었다고 생각했던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살아왔다.
노자의 도덕경 中 훌륭한 지도자에 대해서 언급한 부분이 있다.
(제17장)
가장 훌륭한 지도자는
사람들에게 그 존재 정도만 알려진 지도자,
그 다음은 사람들이 가까이하고 칭찬하는 지도자,
그 다음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지도자,
가장 좋지 못한 것은 사람들의 업신여김을 받는 지도자.
신의가 모자라면
불신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훌륭한 지도자는]말을 삼가고 아낍니다.
[지도자가] 할 일을 다하여 모든 일 잘 이루어지면
사람들은 말할 것입니다.
"이 모두가 우리에게 저절로 된 것이라" 고.
내가 국가를 공기로 생각했다는 것이 지금까지 국가의 지도자들이 가장 훌륭한 지도자여서 그 존재 정도만 알려진 지도자라서 그렇다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정치에 대한 외면과 나와 직접적이지 않은 부분에 대한 무관심 때문이었다. 그래도 가장 좋지 못한 '사람들의 업신여김을 받는 지도자'는 아니였나 보다. 그런데 작년부터 불거져서 결국은 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를 접하고 나서는 도덕경에 언급된 가장 좋지 못한 지도자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잘 모르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민주주의가 정착되어 가는 나라에서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 자체에 다시 한 번 분노했다. 정치에 별 다른 관심은 없지만, 그래도 역사적인 현장에 한 번은 몸을 담고 싶어 홀로 버스를 타고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었었다. 그리고 이후 벌어지는 어이없는 말 바꾸기와 지도자의 품격은 겉 모습 꾸미기에서 나오는 것이라 생각하는 듯한 모습에 부끄러웠다. 저런 사람이 나라의 수장으로 국민들을 이끈다고?
그리고 다시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 를 접했다. 2년 전에 읽고 고이 간직하고 있던 책인데, 세태에 걸맞게 다시 화제가 되고 있다.
이 책을 읽고 나서는 유시민 작가에게 그저 고마웠다. 한 권의 책으로 이런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다. 분명 이 책은 쉬운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유시민 작가 만의 독자를 생각하는 글쓰기가 다시 한 번 돋보인다.
지금까지는 일련의 사건들이 일어나면서 순간 순간의 분노와 잘 모르는 감정에 휩싸여 있었다면, 이 책을 읽고 나서는 무언가 정리가 되는 느낌이었다. 특히 일곱 가지 질문을 던지고 그에 따른 답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막연했던 국가에 대한 개념이 내 머릿 속에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가 살아가는 이 국가가 지금에 이르게 된 과정은 수 많은 역사의 연속선 상에 서 있는 것이었다.
1. 국가를 보는 세가지 입장 (국가주의, 자유주의, 마르크스주의)
2. 국가는 누가 다스려야 하는가? (플라톤, 맹자, 칼 포퍼)
3. 애국심은 고귀한 감정인가? (피히테, 르낭, 톨스토이)
4. 국가 변혁은 어떤 방식으로 가능한가? (마르크스, 톨스토이, 칼 포퍼, 하이에크)
5. 진정한 진보 정치란 무엇인가? (베블런, 김상봉, 이남곡, 아리스토텔레스)
6. 국가가 이상으로 삼아야 할 가치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니버, 마르크스)
7. 정치인에게 필요한 윤리는 무엇인가? (칸트, 베버, 베른슈타인)
특히 혁명이 일어나게 되는 이유를 설명하는 부분은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그 이유는 만약 헌법재판소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기각했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그리고 과연 어떤 방법이 맞는 것일까? 하는 스스로에 대한 의문이 들어서였기 때문이다. 기각을 했다면 헙법재판소의 의견을 겸허히 수용하고 다음 대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민주시민으로서 마땅한 것인지, 아니면 폭력행사를 동원해서라도 무너진 자존심과 국가를 다시 일으켜야 하는지 지금도 결정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p146
혁명의 가능성을 현실로 전환하는 조건은 무엇일까? 어떨 때 민중은 폭력으로 국가를 전복하고 사회의 기본 질서를 바꾸는 사회혁명에 나서게 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라스키의 대답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의 주장을 정리하면 이렇게 된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복종하는 데 너무나 잘 길들여져 있다. 따라서 다수 대중이 정상적인 규범에서 벗어나 폭력으로 저항하는 것은 국가의 중대한 질병에 걸려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혁명이 일어나는 첫 번째 조건은 사회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고, 그 사실을 민중이 분명하게 인지하는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희망이 없는데 특정한 사람들이 반칙으로 부를 축적하고 부당한 특권을 누리고 있다고 믿을 때, 정의가 짓밟히고 불의가 횡행하는 세상이 확 뒤집어져야 한다고 생각할 때, 혁명의 첫 번째 조건이 갖추어진다.
혁명이 일어나는 두 번째 조건은 민중이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사회를 지배하는 사람들에게 그 문제를 해결할 의지와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비록 사회에 큰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국가가 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하고 있다는 확신이 널리 퍼져 있을 경우 폭력사태는 발생하지 않는다. 이것은 혁명의 역사에서 거듭 확인된 바 있다. 프랑스혁명과 러시아혁명을 연구한 학자들은 민중이 폭력행사에 들어가기 전에 끈질기게 개혁을 요구했다는 사실을 두드러진 특징으로 주목한다. 사람들이 지배자의 성의를 더는 신뢰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때 폭력사태가 찾아온다.
혁명이 일어나는 데 필요한 마지막 조건은, 앞에서 지적한 두 가지 조건이 충족한 상황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폭력이 아닌 다른 모든 수단을 남김없이 행사했다는 사실이 널리 인정되는 것이다. 이 조건은 특히 입헌민주주의 정치제도를 가진 나라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민주주의 국가에는 국가를 비판할 자유가 있다. 사회의 기본 질서와 국가운영 방식에 대해서 정부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시민을 설득하여 지지를 얻음으로써 국가권력을 차지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 정부의 임기가 제한되어 있ㄷ으며 정부를 합법적으로 교체하는 데 적용하는 상세한 법규가 마련되어 있다. 마지막 수단인 폭력행사가 대중의 승인을 받으려면, 폭력에 기대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모든 행동방안이 다 사용되었으며, 다른 방법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이 세 가지 조건이 다 충족되면 조만간 사회혁명이라는 열병이 국가를 엄습한다.
보수와 진보가 나뉘어지는 이유를 설명하는 부분도 생각해볼 만 하다. 나에게는 부자들은 '보수' 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그런데 주변의 어른들은 부유하지 않음에도 압도적으로 '보수' 성향인 분들이 많이 있다는 부분이 언제나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젊은 시절 진보의 기수였던 사람들의 보수로의 선회 또한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 하는 의문이 있었다.
p193
유한계급은 부유하기 때문에 혁신을 거부한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은 너무나 가난해서 보수적이다. 혁신을 생각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기존의 사유습성을 바꾸는 것은 유쾌하지 못한 일이며 상당한 정신적 노력을 요구한다. 변화된 환경이 무엇인지, 나의 정신적 태도는 어떠한지,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를 생각하고, 기존의 사유습성을 바꾸는 데 대한 본능적 저항감을 극복하려면 힘겨운 노력을 해야 한다. 지배적 생활 양식에 순종하면서 일상적 생존투쟁을 견뎌내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도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이 과업을 수행하기 어렵다. 풍요로운 사람들은 오늘의 상황에 불만을 느낄 기회가 적어서 보수적인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내일을 생각할 여유가 없어서 보수적인 것이다. 생활환경 변화에 적당한 압력을 느끼면서도 학습하고 사유할 여유가 있는 중산층에서 주로 가장 뚜렷한 진보주의 성향이 형성되고 표출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고령층이 청년들보다 더 보수적인 현상도 마찬가지 논리로 설명할 수 있다. 젊은이들은 기존의 제도와 사유습성에 노출된 기간이 짧으며 지적 활동이 상대적으로 왕성하다. 기존의 사유습성에 대한 집착이 덜하고 그것을 바꾸는 데 쓸 수 있는 정신적 에너지가 풍부하다. 반면 나이가 들수록 기존의 사유습성은 더욱 강력한 지속성을 지니며 그것을 바꾸는 데 쓸 수 있는 정신적 에너지는 부족해진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보수적으로 변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생물학적 필연이다. 역사의 중대한 고비마다 청년층이 낡은 제도와 지배적 사유습성, 전통적 생활양식에 반기를 드는 주체로 나선 것은 바로 이때문이다. 모든 사회에서 청년은 진보적이며 노인은 보수적이다. 고령 유권자들이 압도적으로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이다.
앞으로 선거가 열 흘 정도가 남아 있다. 선거 전에 이 책을 만난 것은 나 자신에게는 행운이다. 이제는 자랑할 만한 대통령은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칼 포퍼의 말 처럼 '최선의 선택보다 최악의 회피가 더 중요하다' 라는 말을 따르기에는 너무 아쉽다. 이제는 조금씩 세상과 정치라는 것에 눈길이 간다. 하지만 그래도 국가라는 것이 공기처럼 그저 곁에 머무른다는 것만을 알아 챌 수 있을 정도 였으면 한다. 그러면 노자가 말한 훌륭한 지도자가 우리에게도 생기게 될 테니...
<국가란 무엇인가 - 합법적 폭력, 고공재 공급자, 계급지배의 도구>
p24
1651년 영국 철학자 토마스 홉스(1588~1679)는 정치 철학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책 가운데 하나인 <리바이어던>을 출간했다. 홉스는 여기에서 '사회계약'을 국가의 기원으로 보는 이론을 세웠다. 홉스의 국가론을 한마디로 줄이면, 국가는 사회 내부의 무질서와 범죄, 외부 침략의 위협에서 인민의 생명과 안전,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정당하게 행사하는 '세속의 신'이다.국가는 숭배하고 찬양해야 마땅한 그 무엇이다. 국가는 인간이 만들었지만 인간을 넘어서는 존재가 된다. 그로부터 무려 4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국가의 본질에 대한 홉스의 통찰력은 여전히 강력한 힘을 유지하고 있다. 홉스의 사회계약론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현대적 국가이론의 출발점이다.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홉스의 대답은 명확하다. 국가는 합법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주체이다. 그는 국가의 합법적 폭력에 무제한의 정당성을 부여했다.
p27
홉스에 따르면 모든 사람이 자기의 자연법적 권리를 한 사람 또는 하나의 합의체에 양도함으로써 하나의 인격으로 통일되는 것이 곧 국가라고 하는 위대한 리바이어던의 탄생이다.
이 인격을 가지는 가지는 자는 주권자가 된다. 다른 모슨 사람은 그의 신민, 즉 군주의 백성이 된다. 그렇다면 누가 주권자가 되는가? 정복을 통해 복종을 강요하거나 합의에 의해 자발적 복종을 끌어내는 사람, 그가 주권자가 된다. 현실에서 주권자는 곧 왕, 그것도 그냥 왕이 아니라 모든 권력을 독점하는 전제군주를 말한다.
p31
'아프리카의 뿔' 소말리아는 아프리카 대륙 북동쪽의 뾰족 나온 반도에 있다. 소말리아 무장반군은 1991년 포악한 독재를 자행하던 군사정권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반군 지도자들 사이의 권력투쟁 때문에 혁명은 곧장 내전으로 번졌다. 크고 작은 파벌과 부족들이 벌인 무력투쟁과 집단학살, 강간, 약탈행위가 난무하는 가운데 소말리아 국민들은 질병과 굶주림으로 죽어갔다. 인구 1,000만 정도인 이 나라에서 내전 발생 이후 20년 동안 40만 명이 목숨을 읽었다. 70만 명이 소말리아를 탈출해 국제난민이 되었다. 나라 안에서 떠도는 난민도 140만 명이나 된다. 유엔과 미군을 중심으로 하는 다국적군이 투입되어 질서유지에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다국적군은 결국 성과 없이 철수했고 내전은 계속되고 있다.
p35
전제군주가 국가권력을 성공적으로 운영하는 데 필요한 '통치술 매뉴얼'도 홉스의 이론보다 먼저 나와있었다. 이탈리아 도시 국가 피렌체의 정치가였던 마키아벨리(1469~1527)의 대표적 <군주론>이 그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스페인의 침략으로 피렌체 공화정이 무너지고 메디치 가의 왕정이 복원된 직후였던 1513년, 이 책을 메디치 가문의 군주 로렌초에게 헌정했다.
p36
홉스의 국가론과 마키아벨리의 통치술은 잘 어울리는 이론서와 매뉴얼이다. 홉스의 국가를 신봉하는 사람이라면 마키아벨리의 통치기술을 당연히 받아들인다.
p37
국가주의 국가론은 국가의 목적을 오직 하나로 규정한다. 사회 내부의 무질서와 범죄, 그리고 외부 침략의 위협에서 인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이다.
국가를 절대화하고 개인을 국가에 종속시키는 전체주의 체제는 언제나 현실적 또는 가상적 위협에 대한 대중의 공포감을 토대로 성립한다.
p39
그들은 사회 내부의 혼란을 방지하고 '북괴의 침략'을 막는 것을 국가의 절대적인 목표로 설정했고 이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국민이 아니라 자기가 가장 잘 판단할 수 있다고 믿었다. "지금은 반대하지만 해놓고 나면 좋아할 것"이라며 국민이 압도적으로 반대하는 사업을 밀어붙인 어느 대통령의 말에 깔린 철학도 바로 이것이었다. 그들은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정치활동의 자유, 평등권과 노동권은 법질서와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하며 통치권을 위협하는 요소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북한 공산집단의 침략 위협과 북괴의 지령을 받는 친북용공세력이 야기하는 내부적 혼란'에 대한 실제적인 또는 조작된 대중의 공포감을 이용하여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유지했다. 이런 공포감은 21세기 첫 10년이 다 지나간 지금까지도 많은 국민들의 의식 저변에 짙게 베어 있다.
p40
국가주의 국가론은 대부분의 문명국가에서 위험한 '전체주의 국가론'으로 간주된다.
p41
국가주의 국가론을 따르는 사람과 정치세력을 가리키는 용어로는 '이념형 보수'가 적당할 것이다.
자유주의 국가론이나 마르쿠스주의 국가론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이념형 보수'를 무식하다고 경멸하거나 시간이 흐르면 사라질 것으로 기대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현실과 희망사항을 잘 구별하지 못한 소치일 가능성이 높다.
p48
전제군주제 국가를 철학적으로 정당화했던 국가주의 국가론이 입헌군주제나 공화제 국가를 꿈꾼 자유주의자들의 도전에 직면한 것을 불가피하고 자연스러운 사태였다. 이 사상적 도전을 현실의 승리로 전환하는 데 기여한 철학자와 정치가는 숱하게 많지만, 대표적인 철학자로 세 사람을 들 수 있다. 존 로크, 애덤 스미스, 존 스튜어트 밀이다.
로크는 시민들의 동의에 의거하여 법에 따르는 통치를 주창했다. 스미스는 사회의 부를 증진한다는 목표 아래 국가가 시행한 자의적 간섭과 특권의 철폐를 제안했다. 밀은 개인의 자유를 국가가 어떤 경우에도 침해해서는 안 되는 기본권을 내세웠다. 이들의 주장을 한마디로 줄이면 국가는 선을 행하려 하기보다 악을 저지르지 않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자유주의 국가론의 핵심이다. 오늘날 거의 모든 산업사회와 문명국가에서는 자유주의 국가론이 지배적 지위를 누리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과 법률도 모두 자유주의 국가론에 입각해 만들어졌다.
p49
로크는 사회계약을 어느 한 사람이나 추상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사회의 다수파에게 권력을 양도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다수파의 대표로서 최고 권력인 국가의 입법권을 장악한 사람은 즉흥적이고 임의적인 명령이 아니라 국민에게 공포되어 널리 알려지고 항구적으로 확립된 법률에 의거하여 통치해야 한다. 아울러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면 공평하고 정직한 재판관들이 법률에 따라 판결해야 한다. 국가의 힘은 나라 안에서 이러한 법률의 집행을 위해서만 행사해야 하고, 밖으로는 외적의 침략에서 공동사회를 수호하기 위해 사용해야 한다. 국가권력은 국민의 평화와 안전, 공공의 복지 이외의 다른 목적을 위해 사용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로크의 주장이었다.
p50
법치주의는 권력이 이러한 속성을 제멋대로 발현하지 못하도록 권력자가 자의적으로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만든 원칙이다. 법치주의는 통치받는 자가 아니라 통치하는 자를 구속한다. 권력자가 주관적으로 아무리 선한 의도나 악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헌법과 법률이 그에게 위임한 권한의 범위를 넘어서, 헌법과 법률이 정한 방법의 한계를 넘어서 그 의도를 실현하기 위한 권력행사를 하지 말라는 것, 이것이 바로 법치주의이다.
p53
스미스는 자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각 개인이 최선을 다해 노동생산물이 최대의 가치를 갖도록 이끈다면, 그는 필연적으로 사회의 연간 수입이 최대의 가치를 갖도록 노력하는 것이 된다. 노동생산물이 최대의 가치를 갖도록 그 노동을 이끈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다. 그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서 그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흔히 그 자신이 진실로 의도하는 경우보다 더욱 효과적으로 사회의 이익을 즟진시킨다." 국민을 부자로 만들고 싶으면 개인의 경제활동에 대한 국가의 자의적인 간섭과 규제를 철폐하라고 한 것이다.
p55
국가는 세속의 신이 아니라 공공재 공급자에 불과하다. 그리고 국가가 공공선을 진작한다는 명분으로 가하고 있던 강제와 규제, 특권을 폐지하는 것이 공공선을 이루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이 이론이 옳다면 국가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문제를 전적으로 통치권자가 판단해야 한다는 국가주의 국가론은 존재근거를 통째로 상실하게 된다.
p58
루소에 따르면 공동사회 구성원들이 인간의 자격을 유지하려면 자유를 지켜야 하며, 자유로운 개인 없이는 국가주권도 성립하지 못한다.
p59
루소는 법치주의에서 이탈한 독재정권과 민주주의 질서를 파괴하는 쿠데타의 정치적 정당성을 모두 부정한 것이다. 루소의 이론에 따르면 4.19혁명, 5.18광주민중항쟁, 6월 민주항쟁은 모두 법치주의를 위반하고 법 위에 군림한 정부에 대한 정당한 저항권 행사로 보아야 한다.
군주가 폭군이 되지 않으려면 반드시 입헌군주제의 군주여야 한다. 이것이 루소가 말하고자 한 결론이다.
p60
루소는 불평등의 원인을 집요하게 파헤친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썼다.
루소는 모든 사회악과 사회갈등의 근원이 경제적 불평등에 있으며 수천 년에 걸쳐 고착화된 불평등을 해소하려면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계약론>에서 루소가 펼친 급진적 정치이론의 배후에는 이런 근본주의적 사회인식이 놓여있었다.
p61
정부에는 주권이 없다. 주권은 국가에 잇다. 정부가 권력을 남용할 경우 관련 규정이 있으면 문책당할 수 있다. 자신에게 부여된 권력을 초월하는 행위를 저지른 것에 대해 정부가 책임을 진다는 사상은 정치행위의 기초로서 법치주의가 자의적 재량을 대체한 모든 나라의 핵심이념이다.
p62
자유주의 국가론에 가장 넓고 깊은 철학적 토대를 제공한 인물은 존 스튜어트 밀(1806~1873)이었다. <자유론>을 통해서 밀은 자유주의 국가이론을 철학적으로 완성했다.
p63
인간사회에서 누구든, 개인이든 집단이든, 다른 사람의 행동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한 가지, 자기보호를 위해 필요할 때뿐이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면, 국가가 그 사람의 의지에 반해서 권력을 사용하는 것도 정당하다. 이 단 하나의 경우 말고는 문명사회에서 구성원의 자유를 침해하는 그 어떤 권력행사도 정당화할 수 없다.
밀은 자유의 기본 영역을 셋으로 나누었다. 첫째는 내면적 의식의 영역이다. 우리는 실제적이거나 사변적인 것, 과학. 도덕. 신학 등 모든 주제에 대해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양심의 자유, 생각과 감정의 자유, 의견과 주장의 절대적인 자유를 누려야 한다. 둘째는 자신의 기호를 즐기고 자기가 희망하는 것을 추구할 자유이다. 사람은 저마다 개성에 맞는 삶을 설계하고 자기 좋을 대로 살아갈 자유를 누려야 한다. 남에게 해를 주지 않는 한, 다른 사람들의 눈에 어리석거나 잘못되거나 틀린 것으로 보일지라도, 그런 이유를 내세워서 간섭해서는 안 된다. 셋째는 결사의 자유이다.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지 않는 한, 그리고 강제로 또는 속아서 억지로 끌려온 경우가 아니라면, 모든 사람은 어떤 목적의 모임이든 자유롭게 결성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정부형태를 가지고 있든 이 세 가지 자유가 원칙적을고 존중되지 않는 사회는 결코 자유로운 사회라고 할 수 없다. 이런 자유를 절대적으로, 무조건적으로 누릴 수 있어야 완벅하게 자유로운 사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p64
밀은 그중에서도 특히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인간의 정신적 복리를 위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어떤 의견에 대해서든 침묵을 강요하면 인간과 사회를 해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그는 그 이유로 네 가지를 들었다. 첫째,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근본적으로 옳지 않은 전제가 없는 한 침묵을 강요당하는 어떤 의견이 진리일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 둘째, 침묵을 강요당하는 의견이 틀렸다고 해도 일부 진리를 담고 있을 수 있으며 실제로 그런 일이 흔하다. 통설이나 다수 의견이 전적으로 옳은 경우는 드물거나 아예 없다. 대립하는 의견들을 서로 부딪치게 해야만 나머지 진리를 찾을 수 있다. 셋째, 통설이 진리일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옳은 것이라고 해도 제대로 검증을 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 근거를 이해하지도 못한 채 하나의 편견으로 간직하게 될 것이다. 넷째, 소수 의견에 침묵을 강요하면 다수 의견 또는 통설이 독단적 구호로 전락해 이성이나 개인적 경험에서 강력하고 진심어린 확신이 자라나는 것을 가로막게 될 것이다.
p65
밀에게 중요한 것은 국가가 아니라 개인이었다. 개인은 공동체의 부속물이 아니라 자기 삶의 주체이다. 개인은, 다른 사람의 자유를 부당하게 침해하지 않는 한, 자기가 원하는 삶을 스스로 설계하고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인생을 살 권리를 가지고 있다. 설혹 그것이 그 사회의 다른 모든 사람들이 마땅치 않게 여기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가 부당하게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 다른 사람이나 사회도 그의 자유를 구속하거나 제약해서는 안 된다. 나는 이것이 자유주의 국가론의 철학적 기둥이라고 생각한다.
p69
소로는 <시민정부에 대한 저항>이라는 글에서 '가장 좋은 정부는 가장 적게 다스리는 정부'라는 표어를 진심으로 받아들인다고 했다. 그는 '가장 좋은 정부는 전혀 다스리지 않는 정부'라는 말을 믿었다.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좋은 정부가 바로 그런 정부이지만 대부분의 정부가 거의 언제나 불편한 정부이고 모든 정부가 때로는 불편한 정부라고 생각했다.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다음 고향에 돌아와 월든 호숫가에 오두막을 짓고 혼자 글을 쓰며 살았던 소로는 미국 연방군이 멕시코를 침략해 영토를 빼앗고, 자기가 살던 매사추세츠 주정부가 노예제도를 수호하는 조처에 예산을 쓰는 것을 보고 세금납부를 거부하다가 체포되었다. 친척이 세금을 대납한 덕분에 하룻밤만 지내고 감옥을 나왔지만, 그는 악을 저지르는 매사추세츠 주와 미합중국에 대한 귀속과 복종을 거부한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p70
'시민의 부록종'은 자유주의자가 악을 저지르는 국가에 저항하는 특별한 방법이다. 소로의 생각과 행동은 단기간에 국가를 변화시키지는 못했지만 긴 세월 지속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잔잔한 물결을 일으켜 국가를 조금씩 변화시켰다. 레프 톨스토이, 마하트마 간디, 마틴 루터킹, 넬슨 만델라가 소로의 길을 따라갔다. 자유주의 국가를 어디까지 변화시킬 수 있을지 아직은 알 수 없다. 국가에 대한 소로의 생각은 단순한 자유주의가 아니라 평화주의와 생태주의 등 더 넓고 다양한 사상에 기반을 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원했던 것이 무엇보다 악을 저지르지 않는 정부였다는 점에서, 그의 국가론은 분명한 자유주의적 색조를 띠고 있었다.
p77
국가권력도 하나의 계급이 다른 계급을 억압하기 위해 조직한 힘일 뿐, 인민이 사회계약을 통해 세운 공동의 권력이 아니다. 국가는 지배계급이 계급투쟁을 수행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의 국가론은 '도구적 국가론'이라고 할 수도 있다.예전의 철학자들은 국가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그 바탕 위에서 국가의 목적이 무엇이며 그 목적을 잘 실현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인간이 평등하고 자유로운 삶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국가를 없애버려야 한다고 했다.
p80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토대는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와 임금노동을 핵심으로 하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이다. 국가는 이 생산관계와 조화를 이루면서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형성된 법률적, 정치적 상부구조에 불과하다.
p81
프롤레타리아트가 국가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새로운 국가가 탄생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 그 자체가 소멸의 길로 들어선다. 생산수단의 소유권을 자본가 개인에게서 '연합된 개인'인 사회로 이전하면, 계급의 차이가 사라지고 국가권력도 정치적 성격을 상실한다.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가운데 하나의 계급으로 단결하고, 혁명을 통해 스스로 지배계급이 되며, 새로운 지배계급으로서 낡은 생산관계를 폐지하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이 생산관계와 함께 계급 대립의 존립조건과 계급 그 자체를 폐지하고 종국적으로 자기 자신의 계급지배도 폐지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계급과 계급대립이 있던 낡은 부르주아 사회 대신에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는 연합체가 들어선다. 이것이 마르크스의 예언 또는 전망이었다.
p85
포퍼의 해석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는 혁명의 방법론이 아니라 순수한 역사이론일 뿌 ㄴ이다.
마르크스는 어떻게 하면 혁명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지, 국가권력을 탈취한 이후 어떻게 사회를 재건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볼셰비키 혁명을 성공시킨 직후 레닌이 깨달은 바와 같이, 마르크스 주의는 실제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레닌이 "이런 문제를 취급하는 사회주의자는 아무도 없었다."고 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레닌이 실시한 소위 신경제정책과 5개년 계획은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과 아무 관계가 없다. 마르크스의 저술에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배분되는 사회에서 각자의 필요에 따라 배분되는 사회로"라는, 아무 소용없는 슬로건말고는 사회주의 경제에 관한 말이 한마디도 없다.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의 심각한 부작용 가운데 하나가 정치 무용론과 정치적 냉소주의다.
p90
마르크스주의의 현실적 위력은 거의 사라졌지만 자본주의 비판이론으로서의 생명력만은 다 타버린 것처럼 보이는 화로 밑바닥에 작은 불씨로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누가 다스려야 하는가>
p96
어떤 능력을 가져야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인민들에게 합법적 폭력을 행사할 권한을 가질 수 있는가? 적절한 답변을 가장 쉽게 제시한 인물은 미래학자로 유명한 앨빈 토플러였다.
무엇이 사람들과 전체 사회로 하여금 '강자'의 뜻에 순종하도록 만드는가? 완력, 돈, 정신의 삼위일체다. 최대한의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이 세 가지 수단 모두를 현명하게 연결하여, 고통스러운 처벌의 위협과 달콤한 보상의 약속을 효과적으로 사용한다. 애초 권력의 원천은 주로 완력이었다. 그러나 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돈이, 그다음에는 지식이 점차 더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미래에 인류의 모든 조직체에서 전개될 권력투쟁의 핵심문제는 지식이다 .지식 그 자체는 최고 품질 권력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물리력과 부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지식은 과거 금권과 완력의 부속물이었으나 이제는 그 본질적 요소가 되었다. 완력에서 돈으로, 그리고 돈에서 지식으로. 토플러는 이것을 인류 문명을 관통하는 보편적 권력이동 현상으로 규정했다.
p97
철학자가 왕이 되어야 한다는 플라톤의 주장은 '목적론'이라는 철학의 기초 위에 서 있다.
p97
플라톤은 만물에는 모두 그 고유의 텔로스 (목적) 가 있다고 생각했다. 플라톤이 국가의 텔로스라고 생각한 것은 바로 정의였다. 국가는 정의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인간공동체라는 것이다 .그러면 정의는 무엇인가? 플라톤은 정의가 무엇인지를 먼저 국가에서 찾은 다음 그 결과를 개인에게 적용하려고 했다. 만약 국가가 건강하고 강하고 통합되고 안정되어 있다면, 그 국가는 정의롭다. 국가가 정의롭게 되려면 국가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들이 각자 자기의 텔로스를 충실하게 실현해야 한다. 지배자는 지배하고, 전사는 싸우고, 노예는 일하는 것이다. 플라톤은 정의를 개인들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계급관계에 근거를 둔 완성된 국가의 한 성질로 간주했다. 이것은 정의에 관한 우리의 관념과 크게 다르다. 우리는 계급특권이 없는 것을 정의라고 하지만, 플라톤은 계급특권을 정의라고 했다.
p98
플라톤은 국가가 자기의 텔로스를 실현하려면 국가의 주권을 철학자에게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철학자는 단순히 철학을 탐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정의인지 아는 사람이다. 플라톤의 철학자는 겸허하게 진리를 찾는 구도자가 아니라 이미 모든 것은 다 안다는 거만한 진리의 소유자이다. 그는 영원한 천국의 '형상'이나 '이데아'를 보고 그것과 교류할 수 있다. 지혜로나 능력으로나 모든 사람 위에 군림하는 신과 같다. 신은 아니더라도 신성한 존재이다 .전지전능한 자에 가깝다. 그는 단순한 철학자가 아니라 철인왕이다. 결국 플라톤이 요구한 것은 학식의 지배 또는 현자의 지배였던 것이다.
p100
맹자가 말하는 덕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측은지심, 나와 타인의 불의를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수오지심, 사랑과 정을 다른 사람에게 적절히 표현하는 사양지심, 그리고 그런 마음을 때와 장소에 따라 어떻게 드러내야 하는지를 판단하는 시비지심이다.
p101
백성들의 물질적 삶을 풍요롭게 하고 인의로 사람을 대하는 덕치만이 군주가 성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역설했다. 이것이 이른바 왕도정치론이다.
통치하는 자의 개인적 능력만이 아니라 그의 지도력에 대한 대중의 승인이 국가권력의 정통성과 안정성을 좌우한다고 보았다. 맹자는 군주를 민심의 바다에 뜬 배와 같다고 보았다. 물을 거스르면 배는 뒤집어진다.
p102
목적론은 철학 발전의 초기단계에서 널리 통용되던 관념론이다.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반복한다는 생물학의 법칙을 적용하면, 목적론은 지성이 아직 제대로 발달하기 전인 어린아이들이 애용하는 사고방식이다.
p104
플라톤이 <국가>에서 소개한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을 요약해보자. 정의는 더 강한 자의 이익이다. 모든 정권은 자기의 편익을 목적으로 삼아서 법률을 제정한다. 민주정체는 민주적인 법률을 ,참주정체는 참주체제의 법률을, 그 밖의 정치체제도 다 이런 식으로 법률을 제정한다. 일단 법 제정을 마친 다음에는 자기들에게 편익이 되는 것을 다스림을 받는 자에게 올바른 것으로 공표하고, 이를 위반하는 자를 범법자나 올바르지 못한 짓을 저지른 자로 처벌한다. 그래서 정의가 더 강한 자의 이익이라는 것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정권의 편익이 정의로운 것이다. 정치 권력이 힘을 행사하기 때문에 정의로운 것은 더 강한 자의 편익으로 귀결된다는 것은 올바른 추론이다.
p106
"사악하거나 무능한 지배자들이 너무 심한 해악을 끼치지 않도록 어떻게 정치제도를 조직할 수 있는가?" 이것이 정치철학이 다루어야 할 올바른 질문이다.
민주주의 정치제도의 목적은 가장 훌륭한 사람을 권력자로 선출하여 많은 선을 행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사악하거나 거짓말 을 잘하거나 권력을 남용하거나 지극히 무능하거나 또는 그 모든 결점을 지닌 최악의 인물이 권력을 장악하더라도 나쁜 짓을 많이 저지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민주주의 정치제도의 목적이며 강점이다. 권력자가 헌법과 법률이 부여한 권한범위 안에서 합법적 수단으로만 통치하도록하는 법치주의, 언론.출판.사상.표현.집회.시위의 자유 등 국민의 기본권은 법률로도 그 본질적 내용을 침해할 수 없도록 한 헌법, 입법부와 사법부를 행정부와 분리하여 서로 감시하고 견제하도록 하는 삼권분립, 감사원과 국가인권위원회 등 국가권력의 오.남용을 예방하고 시정하는 일을 주된 임무로 하는 독립적 국가기관 설치, 복수정당제와 같은 제도화된 권력분산과 상호견제 장치가 민주주의 정치제도의 핵심이 된 것은 모두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였다.
p109
우리는 플라톤이나 맹자와는 전혀 다른 시대에 살고 있다. '누가 다스려야 하는가' 라는 것이 정치철학의 핵심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실시하면 때로는 선하고 훌륭한 인물이 권력을 잡기도 하고, 때로는 위선적이고 사악한 인물이 권력을 잡기도 한다. 그러나 주권재민 사상과 법치주의에 토대를 둔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잘 가꾸기만 한다면, 위선적이고 사악한 인물과 정치세력을 국민이 언제든 합법적으로 징계하거나 해고할 수 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가 인간이 발명한 가장 부작용이 적은 정치제도라는 점을 알고 주권자로 참여하여 그것을 발전시켜나가는 일이다.
<애국심은 고귀한 감정인가>
p116
애국심은 다른 사랑의 감정과는 다르다. 사랑의 대상이 특별하기 때문이다. 국가는 폭력을 행사하는 조직이다. 국가는 합법적이고 정당하다고 간주되는 물리적 폭력을 독점적으로 보유하고 행사한다. 다른 어떤 사랑의 대상도 국가와 같지 않다. 그래서 애국심도 다른 사랑의 감정과 다르다. 폭력조직을 사랑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 폭력에는 정당성과 합법성이 없다. 국가는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사적 폭력도 용납하지 않는다. 동창회, 향우회, 종친회, 가수나 프로축구팀 팬클럽, 정당들 사이에도 은근한 또는 치열한 경쟁이 있다. 하지만 어떤 경쟁도 정당하다고 간주되는 폭력을 동반하지 않는다. 오로지 국가만이 국민에 대해서, 다른 국가에 대해서 정당하다고 간주될 수 있는 폭력을 행사한다.
고귀한 사랑의 감정일 수 있는 애국심 뒤에는 결코 사랑하기 어려운 또 하나의 야비한 얼굴이 숨어 있다. 경쟁 관계에 있는 다른 국가에 대한 증오심 또는 혐오감이 그것이다. 애국심은 내가 속한 국가를 사랑하는 감정인 동시에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국가를 배척하는 감정이다. 국가는 때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전쟁과 학살이라는 끔찍한 참화 속으로 몰아 간다. 다른 어떤 사랑의 감정도 이런 엄청난 악을 저지르도록 사람을 부추기지는 않는다.
애국심을 표현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애국심을 발현하는 최고의 형식은 국가를 위해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거나 실제로 죽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행위를 한 사람들을 애국자 또는 국가유공자라고 부른다. 모든 국가는 이런 애국자를 보유하고 있으며, 국민들은 그들을 존경하고 추앙한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나라 국민들에게는 악을 저지른 인물로 간주되기도 한다. 예컨대 백범 김구 선생과 안중근 의사는 대한민국의 대표 애국지사이지만 많은 일본 국민들은 그분들을 테러리스트나 암살범으로 간주한다. 안 의사가 사살한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국민에게는 애국자이지만 우리 국민은 범죄자로 여긴다. 이 모두가 애국심이 지닌 두 얼굴 때문에 생기는 불가피한 현상이다. 한국전쟁 때 전사한 군인들에 대해서도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각각 자기 쪽의 군인들만을 애국자로 받는다.
p118
폭력을 독점한 하나의 권력이 지배하는 공간이 바로 영토이다. 하나의 영토는 둘 이상의 권력에 동시에 귀속될 수 없다. 권력의 배타성이 그 자체가 배타적인 국경으로 가시화되는 것이다. 영토는 국경의 기능에 의해 주권의 필수적 구성요소이다.
애국심이 성립하려면 사랑하지 말아야 할 외부의 대상이 있어야 한다.
p119
다른 국민국가들도 다르지 않다. 예컨데 프랑스는 잔 다르크 이전에도 존재했다. 그러나 '프랑스'라는 단어가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된 계기는 14세기와 15세기에 걸쳐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벌엿던 백년전쟁이었다. 열일곱 살 소녀 잔 다르크가 이 전쟁의 막바지에 벌어진 오를레앙 전투에서 절대적 열세에 있던 프랑스군을 이끌고 잉글랜드 군을 격파함으로써 단숨에 전세를 역전시켰다. 포로로 잡힌 후 잉글랜드가 지배하던 노르망디 지역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겨우 열아홉 나이로 화형에 처해졌던 문맹 소녀 잔 다르크는 프랑스 애국주의의 화신이 되었다. 프랑스라는 단어는 그 이전과는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영국의 침략과 지배가 프랑스인들로 하여금 민족적 자각을 하게 만든 것이다. 이처럼 하나의 자아는 항상 다른 자아와 대비되어 창조된다.
p125
피히테는 모든 어린이에 대해 강제적이고 보편적인 국가교육을 실시함으로써 독일 사회를 완전하게 재구성하고 싶었다. 그에게 국가는 단순한 국가가 아니다. 국가는 영원성을 보증하는 세속의 시닝다. 이 세속의 신이 인간의 아들딸을 부모에게서 일시적으로 빼앗아 집단 생활과 대중교육의 축복 속으로 집어넣는다. 어린이들은 여기서 살아 있는 언어로 애국심을 교육받아 국가의 목표와 자기 자신의 삶의 목표를 동일시하는 애국적 독일 국민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러한 정신의 혁명을 경험한 국민들은 자유를 되찾은 후에도 자신과 국가를 동일시하기 때문에 즐거운 마음으로 조국을 위해 총을 들고 전쟁터로 나간다. 이러한 교육제도가 영속되면 개인은 죽어 없어질지라도 민족과 조국은 영속한다. 태양 아래 영원한 것이 없다는, 모든 헛되고 또 헛된 이 세상에서,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영원성은 오로지 민족과 조국뿐인 것이다. 따라서 애국심은 단연, 인간이 지녀야 할 모든 감정 가운데 가장 고귀하다.
p126
피히테의 보편적 국가교육은 나치 시절 '히틀러 유겐트'와 같은 청소년 세뇌 교육 조직을 통해 부분적으로 실현되었다. 권력자들이 국가가 국민을 교육해야 한다고 진지하게 믿었던 유신시대 우리나라에서도 일부 실현되었다. 국가가 만들어 교실마다 붙여두고 학생들로 하여금 강제로 전문을 외게 했던 '국민교육헌장'이라는 것이 있었다. 국가가 국민을 훈육해야 한다는 발상의 산물인 이 '발칙한 헌장'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가탇.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내가 세상에 나온 목적을 친절하게도 대통령이 정해준 것이다. '민족중흥'이라는 국가의 목표는 곧 나의 개인적 인생목표가 되었다. 피히테는 단순한 애국자가 아니었다. 그는 교육 또는 세뇌를 통해 온 국민의 삶을 획일적 국가목표에 종속시키려 했던 전체주의자였다. 애국심과 국가주의, 애국주의와 전체주의 사이에는 쉽게 오갈 수 있는 넓은 길이 있다. 피히테는 그 길을 주저 없이 걸어갔다.
p128
애국심에 대해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했다. 애국심은 자기 국민만을 사랑하는 감정이다. 자기 마음의 평정과 재산을 희생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바치면서 적의 침략과 학살에서 국민을 보호한다는 신조이다. 애국심은 모든 국가의 국민들이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다른 나라의 국민들을 침략하고 학살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생각하던 시절의 개념이다. 하지만 이미 2,000년 전에 인류는 인류의 지혜를 대표하는 최고의 스승들을 통해 형제애라는 높은 차원의 개념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 개념은 인간의 의식 속에 더욱더 깊숙이 침투해 오늘날 매우 다양한 형태로 현실화되기에 이르렀다. 통신수단이 발달하고 산업이나 무역, 예술, 과학의 연계성이 커지면서 사람들은 서로서로 긴밀한 관련을 맺었다. 이렇게 해서 이웃 국가의 침략이나 정복, 학살이라는 위협은 자취를 감추었다. 모든 국민들이 함께 평화 속에서 상호 협력의 원칙에 따라 상업적, 산업적, 예술적, 과학적 우호 관계를 이루며 살고 있다. 따라서 애국심이라는 낡은 감정은 점차 수그러들어 마침내 완전히 사라지리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는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났다. 시대에 뒤떨어지고 인류에게 해만 되는 이 감정이 계속 존재할 뿐만 아니라 더욱더 격렬하게 불타오르고 있는 것이다.
p129
톨스토이는 비뚤어진 애국심이 아니라 애국심 그 자체를 악으로 보고 있다.
p130
일본 총리와 각료들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면 한국과 중국의 정부와 언론은 화를 내고 비판을 한다. 야스쿠니 신사에는 전쟁범죄자들의 위폐가 있다. 그들은 이웃 나라를 침략하여 영토를 강점하고 압제와 학살을 저질렀던 침략전쟁의 주역이다. 총리와 각료가 신사를 참배하는 것은 곧 그들의 범죄를 애국적 행위로 받는 것이다. 일본 정부가 그들을 애국자로 추앙한다면, 그것은 언젠가 기회가 올 경우 또 다시 침략전쟁을 하겠다는 의사를 표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이웃 나라 정부와 국민들이 비판하는 것이다. 그와 달리 독일은 수도 베를린에 홀로코스느 기록관을 만들어 나치가 저지른 전쟁범죄에 대해 매 순간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그것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침략전쟁을 벌인 국가의 명령을 수행하다가 죽은 독일 군인들을 애국자로 추모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그들의 행위와 동기가 무엇이었는지 구분하지 ㅇ낳고 국가의 명령을 따르다가 목숨을 잃은 모든 사람들을 애국자로 예우한다. 호전적이고 맹목적인 애국심과 참되고 올바른 애국심 사이에 분명한 경계선이 그어져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p132
우리 겨레가 한반도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다시 국가적 통일을 이룬다면 한국전쟁의 처절한 악몽의 기억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그 기억이 계속해서 힘을 발휘한다면 우리는 하나의 민족공동체를 형성하지 못할 것이다. 더 큰 결속을 위해서는 망각과 용서가 필요하다.
p134
이렇게 보면 독일어를 쓰는 주민이 많다는 것을 명분으로 들어 주민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알자스와 로렌 지역을 독일에 편입시킨 프로이센의 행위는 부당한 것이다. 르낭이 그 지역을 반드시 프랑스에 귀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는 영토와 국경선을 설정할 때는 주민의 의지를 존중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주장했다. 주민들에게 어디에 귀속되기를 원하는지 물어보라는 것이다. 주민들은 그 문제에 대해 의견을 가질 권리가 있다. 한 민족은 결코 그 주민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병합되거나 압류될 수 없다. 르낭은, 이런 주장을 가리켜 단순하고 유치한 방법으로 외교와 전쟁을 대체하라는 보잘것없는 이념이라고 비웃는 사람들이 지나갈 것이며, 아무 결실 없는 노력을 많이 한 후에야, 사람들은 경험으로 검증한 겸허한 해결책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그리고 미래에 옳은 편에 서기 위해서 시류에 뒤떨어진다는 평가를 참고 받아들였다.
p135
피히테와 르낭, 톨스토이는 애국심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이해했다. 피히테에게는 '살아 있는 언어'가, 르낭에게는 '함께 귀속되고자 하는 의지'가 중요했다. 톨스토이에게 민족애, 조국애 또는 애국심은 이성으로 근절해야 하는 유해하고 근거 없는 허위의 감정이었다.
<혁명이냐 개량이냐>
p142
사회혁명론부터 시작해보자. 모든 국가는 인민에게 복종을 요구한다. 복종을 거부하는 자는 폭력으로 응징하며 순종하는 자에게는 보상을 약속한다. 그런데 때로 인민은 복종을 거부하고 힘으로 대항하여 국가를 전복하고 사회질서를 변혁한다. 이것이 혁명이다. 혁명은 국가 권력을 장악한 사람들이 스스로 폭력행사를 포기하지 안흔ㄴ 한 반드시 폭력을 동반한다. 평화적 선거를 통해 넬슨 만델라에게 권력을 양도했던 남아프리카공화국 백인 정부와 스스로 브란덴부르크 문을 열였던 동독 정부의 사례는 희귀한 예외에 속한다. 이 두 국가는 사회 질서의 혁명적 변화를 겪었지만 권력자와 민중 어느 쪽도 결정적인 국면에서 폭력을 동원하지 않았다.
폭력 중에서 낡은 국가권력이 발 딛고 있던 사회의 기본 질서를 바꾸는 혁명이 사회혁명이다.
부르주아지가 주도한 프랑스대혁명, 레닌이 지도한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마오쩌둥이 이끈 중국혁명이 사회혁명의 대표적인 사례였다. 사회혁명은 엄청난 폭력과 내전, 학살을 동반했고, 국가와 사회의 기본 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꾸엇다. 이것은 좋은 길인가? 좋든 싫든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사건인가? 그렇다면 사회혁명은 언제, 어떤 조건에서 일어나며 어떤 결과를 낳았는가?
p143
자본주의를 타도한 사회주의 혁명은 고도로 발전한 산업국가가 아니라 러시아와 중국같이 뒤떨어진 농업국가에서 일어났다. 동유럽 사회주의 혁명은 사회 내부에서 발생했다기보다는 제2차 세계대전의 포연 속에서 동유럽을 점령한 소련 군대의 물리적 지배력에 의해 이식 된 것이었다. 북한의 사회주의 혁명 또는 인민민주주의 혁명 역시 마찬가지였다.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문만 돌았을 뿐 정작 그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본주의가 가장 고도로 발전한 영국, 프랑스, 미국과 같은 산업국가에서는 사회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국가가 단순한 계급지배의 도구가 아니며, 물질적 이해관계의 대립이 사함의 정치적 행위를 결정짓는 유일한 변수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국가에 대해서, 국가를 바라보는 인간의 의식에 대해서, 너무나 낙관적이고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p146
혁명의 가능성을 현실로 전환하는 조건은 무엇일까? 어떨 때 민중은 폭력으로 국가를 전복하고 사회의 기본 질서를 바꾸는 사회혁명에 나서게 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라스키의 대답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의 주장을 정리하면 이렇게 된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복종하는 데 너무나 잘 길들여져 있다. 따라서 다수 대중이 정상적인 규범에서 벗어나 폭력으로 저항하는 것은 국가의 중대한 질병에 걸려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혁명이 일어나는 첫 번째 조건은 사회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고, 그 사실을 민중이 분명하게 인지하는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희망이 없는데 특정한 사람들이 반칙으로 부를 축적하고 부당한 특권을 누리고 있다고 믿을 때, 정의가 짓밟히고 불의가 횡행하는 세상이 확 뒤집어져야 한다고 생각할 때, 혁명의 첫 번째 조건이 갖추어진다.
혁명이 일어나는 두 번째 조건은 민중이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사회를 지배하는 사람들에게 그 문제를 해결할 의지와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비록 사회에 큰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국가가 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하고 있다는 확신이 널리 퍼져 있을 경우 폭력사태는 발생하지 않는다. 이것은 혁명의 역사에서 거듭 확인된 바 있다. 프랑스혁명과 러시아혁명을 연구한 학자들은 민중이 폭력행사에 들어가기 전에 끈질기게 개혁을 요구했다는 사실을 두드러진 특징으로 주목한다. 사람들이 지배자의 성의를 더는 신뢰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때 폭력사태가 찾아온다.
혁명이 일어나는 데 필요한 마지막 조건은, 앞에서 지적한 두 가지 조건이 충족한 상황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폭력이 아닌 다른 모든 수단을 남김없이 행사했다는 사실이 널리 인정되는 것이다. 이 조건은 특히 입헌민주주의 정치제도를 가진 나라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민주주의 국가에는 국가를 비판할 자유가 있다. 사회의 기본 질서와 국가운영 방식에 대해서 정부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시민을 설득하여 지지를 얻음으로써 국가권력을 차지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 정부의 임기가 제한되어 있ㄷ으며 정부를 합법적으로 교체하는 데 적용하는 상세한 법규가 마련되어 있다. 마지막 수단인 폭력행사가 대중의 승인을 받으려면, 폭력에 기대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모든 행동방안이 다 사용되었으며, 다른 방법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이 세 가지 조건이 다 충족되면 조만간 사회혁명이라는 열병이 국가를 엄습한다.
성공한 사회혁명이 일어난 모든 곳에서 국가는 썩은 문짝처럼 부패하고 허약하다.
p150
프랑스대혁명은 나폴레옹의 유럽 정복전쟁과 황제 등극, 반혁명과 왕정복고로 귀결되었다. 러시아혁명은 스탈린의 참혹한 독재와 동서 이데올로기 전쟁을 낳았다. 중국혁명은 대약진운동을 거쳐 문화대혁명이라는 또 다른 내전으로 이어졌지만, 지금 중국 사회는 공산당 일당독재 하나를 제외하면 혁명이 지향했던 이상과는 매우 다른 길을 걷고 있다. 그 혁명들에 대해서 독자들은 각자가 나름의 규범적 판단을 할 것이다.
p151
권력기관이 존재하는 한, 모든 부는 계속해서 권력자의 수중에 들어갈 것이다. 톨스토이는 혁명이 권력기관 그 자체를 없애지는 못한다고 생각했다.
p152
아무리 생각해도 세속의 해법을 찾을 수 없었던 톨스토이는 결국 종교적 해결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가 제시한 방법은 각자가 욕망을 줄이는 것이었다. 사람들에게 진정한 행복의 계시하고, 부가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행복을 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임을 보여주어야 한다. 세속적 욕망의 구멍을 막는 것 말고는 집 안 골고루 열을 보낼 방법이 없다. 이것이 톨스토이가 얻은 결론이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이 훌륭하게 사는 세상을 원했다. 사람들 사이에 훌륭한 삶이 존재하려면 먼저 사람들이 훌륭해져야 한다. 사람들을 훌륭한 삶으로 인도하는 방법은 단 한 가지, 스스로 훌륭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훌륭한 삶을 정착시키는 데 이바지하고자 한다면 스스로 수양하면서 복음서의 다음 구절을 실천하라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한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p154
포퍼는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도모하는 혁명에 '플라톤식 접근법에 입각한 유토피아적 공학' 이라는 독창적인 이름을 붙였다. 플라톤적 접근법이란 '정치문제에 대한 목적론적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의미한다. 플라톤식 접근법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합리적 행위는 어떤 목적을 가진다. 합리적으로 행동하려면 먼저 목적을 설정해야 한다. 정치활동의 영역에 이것을 적용하면, 어떤 실제적 정치행위를 하기 전에 먼저 궁긍적인 정치적 목적이나 이상국가의 모습을 정해야 한다. 원하는 사회의 청사진을 손에 쥐어야,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과 수단을 고려하고 행동계획을 세울 수 있다. 이것이 합리적 정치운동의 필수적 예비행위이며 사회공학의 준비작업이다. 설득력있고 매력적인 접근법이다.
p155
탐미주의적 열광은 이성과 책임감, 남을 도우려는 인도주의적 충동에 의해서 억제될 때만 가치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신경증이나 병적 흥분상태로 발전하기 쉬운 위험한 열광이 된다.
그가 점진적 공학이라고 이름 붙인 사회개량의 길이다. 점진적 공학을 채택하는 정치가는 이상적 사회의 청사진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어떤 경우에도 최대의 궁극적 선을 추구하고 그 선을 위해 투쟁하기보다는 최대의 악과 긴급한 악에 대항해서 투쟁한다. 그런데 사회생활은 너무 복잡하다. 사회 전체를 개조하는 유토피아적 공학의 청사진이 정말 좋은 것인지, 만인을 행복하게 할 것인지, 어떤 실현방법이 있을지 판단하기 어렵다. 반면 점진적 공학의 청사진은 상대적으로 단순하다. 건강보험, 고용보험, 불경기대책, 교육개혁과 같은 단일제도에 대한 청사진이다. 이것은 악용 위험이 적고 잘못될 경우 조정하기도 쉽다. 게다가 이상적 선과 선을 실현하는 수단에 대한 합의보다 현존하는 악과 악을 퇴치하는 방법에 대한 합의가 더 수월하다. 합리적인 타협안에 도달할 가능성도 있고 민주적 방법으로 문제를 개선할 수도 있다. 이것이 점진적 공학의 장점이다. 유토피아적 공학은 이상국가를 실현하기 위한 강력한 중앙집권을 요구하며 독재로 흐르기 쉽다.
p156
사회혁명이라는 유토피아적 공학이 논리적 비판을 이겨내려면 두 가지 가정이 필요하다. 첫째, 최고의 선 또는 이상적인 사회가 어떤 것인지 절대적으로 확실하게 결정하는 합리적인 방법이 있어야 한다. 둘째, 이상적인 사회를 만드는 최선의 수단이 무엇인지 절대적이고 확실하게 결정하는 합리적 방법이 있어야 한다. 유토피아적 공학 신봉자들 사이의 건해 차이를 해소할 합리적 방법이 없다면, 이성이 아니라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밖에 없다. 이상은 결코 실현될 수 없다거나 언제까지나 꿈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사회 전체를 재구성하는 일은 경험과 지식의 제약 때문에 그 셀제적 결과를 예상하기 어려운 너무나 전폭적인 변화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포퍼는 그런 야심만만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실제적 지식이 인간에게는 없다고 생각했다.
p157
포퍼는 마르크스와 같은 견해를 표명했다.
"제한되지 않는 자유는 자멸한다."
포퍼는 경제력 권력을 가진 사람, 다시 말해 자본가와 부자들이 경제적 약자의 자유를 강탈하고 불평등한 관계를 강요하는 것을 방치하는 것은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국가의 의무를 팽개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보았다. 국가는 시민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간섭해야 한다.
그러면 국가는 어떻게 간섭해야 하는가?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보호제도의 '법률적 틀'을 설계하는 제도적 간섭이다. 단결권을 비롯한 노동3권 보장, 해고 보호, 유아노동 금지와 모성 보호, 산업안전과 산업보건을 위한 규제, 법정노동시간 제한, 최저임금제 등 우리가 알고 있는 노동시장에 대한 국가 규제가 모두 이 제도적 간섭에 포함된다. 둘째는 통치자가 설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권력기관을 동원하여 어떤 범위 내에서 조처를 취하는 '대인적, 직접적 방법' 이다. 이것은 국가권력이 구조가 아니라 과정에 개입하여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부당하게 경제적 약자의 자유를 침해하고 착취하는데도 이를 시정할 법률과 제도가 마땅치 않을 때, 국가는 정치적 권고와 협조 요청이나 국세청, 검찰, 경찰 등 권력기관을 활용한 압박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런데 "민주적 간섭주의는 언제나 제도적 방법을 우선적으로 택하며, 이것이 부적합한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직접적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p159
포퍼는 피지배자가 민주주의를 통해서 정치적 지배자로 하여금 경제권력을 통제하게 해야 하며 또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부가 나서서 막강한 경제권력을 가진 재벌이 그 힘으로 노동자와 국민을 착취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다. 경제적 강자가 노동자와 거래업체와 소비자를 부당하게 착취하는 일을 막기 위해 정부가 개입하는 것을 모조리 '반시장정책' 이라고 비난하는 전국경제인연합회 임원들은 포퍼의 책을 꼼꼼히 읽지 않았음에 분명하다.
p160
포퍼가 모든 폭력혁명에 반대했던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폭력혁명도 정당하다고 인정했다. 물론 그 혁명은 사회혁명이 아니다. 독재를 타도하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한 정치혁명이다.
민주주의는 '주권재민'이나 '다수의 지배'와 같은 모호한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통치자에 대한 공적 통제를 허용하고, 피통치자가 통치자를 해고할 수 있게 하며, 통치자의 의사에 반하는 개혁을 폭력행사 없이 피통치자들이 할 수 있게 하는 일련의 제도적 틀을 의미한다. 폭력의 사용은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는 개혁이 불가능한 폭군 치하에서만 정당하다. 그리고 그 목적은 오로지 하나, 폭력 없이 개혁할 수 있는 상황을 조성하는 것이어야 한다. 폭력적 수단으로는 그 이상의 것을 성취할 수 없다.
p161
개량과 혁명에 대한 포퍼의 견해를 요약해 보자. 유토피아적 공학인 사회혁명은 사회 전체의 근본적 재구성을 추구하지만, 인간이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경험과 지식의 제약 때문에 더 큰 악을 불러들일 위험이 있다. 더 안전하고 효과적인 방법은 최고의 추상적인 선을 위해서가 아니라 가장 긴급하고 구체적인 악과 싸우는 점진적 공학이다. 점진적 공학의 필수조건은 피통치자가 통치자를 통제할 수 있게 하는 자유와 민주주의 정치제도이며, 독재가 이 가능성을 차단할 때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한 폭력혁명도 정당하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통해서 어떤 선을 어디까지 실현할 수 있을지는 선험적으로 예단할 수 없다. 그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
점진적 공학으로는 문제가 되는 불평등과 사회악을 전혀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할 때 비로소 사회혁명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점진적 개량의 길이 넓게 열려 있는 사회에서는 사회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이 없다. 그 길이 막혀 있다는 것이 널리 인식되고 확인될 때 비로소 사회혁명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실제 역사에는 둘 모두가 공존했다. 그리고 거대하고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킨 것은 점진적 개량이 아닌 사회혁명이었다.
'점진적 공학'은 사회혁명의 불벼락이 국가권력을 덮치기 전에 이미 권력 내부에 들어와 있었던 사람들의 몫일 뿐이다. '최악의 긴급한 악'으로 인해 숨이 넘어가기 직전 상황에 몰려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오로지 사회혁명의 길 하나만 남아 있었다.
p165
포퍼는 모든 종류의 집단주의와 전체주의를 거부했다. 그가 보기에 히틀러의 독일과 스탈린의 소련은 단일가치가 사회 전체를 지배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동일한 전체주의 체제였다. 따라서 사회혁명을 추구하는 이상주의를 매몰차게 비판한 것은 논리적으로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는 전체주의 체제를 정당화하는 철학의 기초를 제공한 인물로 플라톤과 헤겔을 지목했다.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플라톤과 헤겔에 대해 논리적 비판을 넘어서는 정서적 적대감을 가감 없이 드러낸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에 대해서는 국가의 소멸과 자유로운 개인의 자발적 연합체로서의 사회를 소망했다는 점을 들어 시종일관 우호적인 태도를 보인다.
p167
포퍼는 인간이 극복할 수 없는 경험과 지식의 부족을 이유로 들어 사회혁명에 반대했다. 그런데 하이에크는 혁명의 열정에 사로잡힌 사람들 그 자체를 신뢰하지 않았다. 사회혁명의 열정을 광신으로 본 것이다. 하이에크에 따르면 사회를 계획하고자 하는 가장 열광적인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계획할 수 있게 된다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계획을 조금도 인내하지 못하는 가장 위험한 사람이 된다. 성자와 같은 일편단심의 이상주의자로부터 미치광이 광신자까지의 거리는 단지 한 발짝에 불과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p170
사상의 생명은 서로 다른 지식과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다양한 개인들의 상호작용이다. 이성은 그와 같은 차이를 만들어내는 사회적 과정을 통해서 성장한다. 인간과 사회와 자연에 대한 어떤 견해가 이성의 성장을 도울 것인지 우리는 미리 예측할 수 없다. 지금 가진 어떤 견해를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해 모두에게 강요하면 이성은 성장할 수 없다. 집단주의 사상의 비극은, 이성을 숭고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출발했지만 이성이 성장하는 과정을 잘못 이해함으로써 이성을 파괴하는 것으로 종결된다는 것이다. 소련과 중동부 유럽, 중국, 루마니아, 북한 등의 사례를 살펴보면 하이에크의 견해를 반박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 우리가 가진 지식을 토대로 사회의 최종목표를 설계한 다음, 그 설계에 따른 계획에 들어 있지 않거나 그것과 충동하는 다른 어떤 견해도 허용하지 않는다면, 그 사회에서는 필연적으로 이성의 성장과 정신적 발전이 멈추어 서게 된다.
p175
사회혁명을 '유토피아적 공학'이라고 불렀던 카를 포퍼는 선을 실현하려는 원래의 목적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초래한다는 이유로 사회혁명에 반대하면서 사회를 점진적으로 개량하는 '점진적 공학'을 지지했다. 그런데 하이에크가 반대한 '사회계획'에는 사회혁명 뿐만 아니라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민주주의 기본 질서와 합법적 절차를 지키면서 점진적으로 사회를 개량하는 포퍼의 '점진적 공학'까지 모두 포함된다. 인간이 사회를 통제하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를 비판한 것이다. 하나의 가치 또는 목표가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전체주의 사회를 비판하고, 그것을 만들기위해 폭력사용을 불사하는 사회혁명에 반대하는 하이에크의 견해는 폭넓ㅅ은 공감을 얻을 수 있다.그러나 하이에크는 자유라는 하나의 가치를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유라는 하나의 가치가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사회는 정의나 평등이라는 단일 가치가 지배하는 다른 전체주의 사회와 무엇이 다른지 의문이다.
p180
하이에크는 더 좋은 사회로 가는 길을 어디에서 찾았을까? 답은 국가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하이에크는 사람들이 개인주의 사회를 움직이는 원천이 되는 미덕을 존중하지도 실천하지도 않는 현실을 개탄했다. 독립심, 자조,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는 태도, 다수에 대항하여 자기의 소신을 지키는 각오, 이웃과 자발적으로 협력하는 태도가 그것이다. 집단주의는 이런 미덕을 모두 파괴한다. 그 결과 개인에게 복종하고 집단적 결정을 실행하도록 강제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 말고는 아무것도 채울 수 없는 공백이 남게 된다. 그리하여 전체주의 사회에는 개인의 도덕적 선택 기회가 점차 축소되어 결국 주기적인 대표자 선거만 남게 된다는 것이다.
1980년대 대처 총리와 레이건 대통령 시절 영국과 미국 사회를 지배했던 신자유주의는 이론적, 정책적인 측면에서는 케인즈주의 경제정책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p181
사회혁명의 길과 점진적 개혁의 길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가? 이것은 처음부터 잘못 만들어진 질문이다. 그것은 약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결과가 불확실하고 폭력을 동반하는 사회혁명과 위험이 적고 폭력을 사용할 필요가 없으며 결과가 즉각적,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점진적 개혁의 길 가운데 사회혁명을 선호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점진적 개혁의 길이 봉쇄된 곳에서만 사회혁명의 길이 길을 연다. 카를 마르크스가 폭력을 좋아하는 성향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필연성을 논증한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의 시대 유럽 자본주의 사회는 노동자 계급이 집잔적 궁핍과 소외, 억압과 착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점진적 개혁의 길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p182
사회혁명의 문을 걸어 잠그고 싶다면 부지런히 점진적 개량을 시도해야 한다.
<진보정치란 무엇인가>
p185
우리는 대표적인 국가론 세 가지를 이미 살펴보았다. 국가주의 국가론은 이념형 보수, 자유주의 국가론은 시장형 보수,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은 진보의 국가론으로 분류했다. 그런데 자유주의 국가론은 단순하지 않다. 산업화된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보수정치세력의 국가론으로 널리 인정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국가가 악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권력을 분산하고 견제하는 데 중점을 두는 쪽이 있는가 하면, 자유주의적 기본 질서를 튼튼히 하면서도 시장에서 벌어지는 불의를 바로잡고 선을 실현하는 데 국가가 적극 나서야 한다고 보는 쪽도 있다. 자유주의 내부에도 보수와 진보가 있는 것이다.
p186
진보는 보수와 어떻게 다르며, 진보정치란 국가를 어떻게 바꾸려고 하는 것인가? 이것이 국가와 관련하여 이 책에서 다루는 다섯 번째 질문이다.
인간의 삶은 다른 종과 마찬가지로, 생존을 위한 투쟁이자 선택적 적응의 과정이다. 사회환경도 인간의 사고방식도 모두 시간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진화한다. "인간이 만든 제도와 인간 특성에서 일어나는 진보는 최적의 사유습성이 자연 선택되는 과정이다." 이 난해한 문장을 통해 베블런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한마디로 사회의 진보는 생물의 진화가 그런 것처럼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자연적 현상이라는 것이다.
제도의 교체는 낡은 사유습성이 지배적인 지위를 잃고 새로운 사유습성이 그 자리를 차지할 때 현실이 된다. 왕조국가 조선과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은 판이한 제도의 집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제도의 차이는 지배적 사유습성의 차이를 반영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진보주의와 보수주의는 모두 사유습성과 생활방식, 제도의 변화에 대응하는 정신적 태도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진보주의는 생활환경의 변화가 요구하는 새로운 사유습성과 생활방식, 그에 따르는 제도의 조정 필요성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하려는 정신적 태도이다. 보수주의는 새로운 사유습성을 거부하고 변화에 저항하려는 정신적 태도를 가리킨다. 보수주의의 핵심은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옳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진화의 법칙을 인간의 제도에 적용하면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틀렸다." 고 해야 마땅하다. 과거의 지배적 사유습성을 체현하는 현재의 제도는, 최소한 어느 정도는 오늘의 생활환경이 요구하는 최적의 대응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서로 다른 정신적 태도를 가지게 되는 것인가? 왜 누구는 보수주의자가 되고 누구는 진보주의자가 되는가? 베블런의 이론에 따르면 생활환경의 변화에 강하게 노출되는 사람이 먼저 새로운 사유습성을 받아들인다. 사회는 개인으로 구성된다. 사회의 공인된 생활양식은 옳은 것, 선한 것, 합당한 것,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합의를 토대로 성립한다. 그런데 생활환경의 변화가 몰고온 충격이 모든 개인에게 똑같이 전달되지는 않는다. 어떤 환경의 변화를 긴급한 상황으로 인식한 사람은 새로운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을 신속하게 받아들인다. 진보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보수주의자는 진보주의자의 여집합이다. 보수주의자는 기존의 지배적 사유습성과 생활양식을 그대로 따르려고 한다. 이것은 인간의 삶에서 보수주의가 기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환경의 변화에 의해 강요당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모두 영원히 보수주의자로 살아갈 것이다. 보수주의는 특정한 계급의 독점적 특성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 속성이다. 확신에 찬 진보주의자에게는 우울한 이야기일지 모르겠으마, 베블런의 말을 부정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보수주의를 편든 것은 아니었으니 그를 미워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p190
보수주의는 진보주의와 마찬가지로 물질적 이해타산의 직접적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와 삶을 대하는 특정한 정신적 태도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유한계급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하위 소득계층 유권자들이 보수적인 태도를 보인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그들은 선거를 할 때 주로 진보정당이 아니라 보수정당에 표를 준다. 어떻게 된 일인가?
p191 ###
유한계급은 부유하기 때문에 혁신을 거부한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은 너무나 가난해서 보수적이다. 혁신을 생각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기존의 사유습성을 바꾸는 것은 유쾌하지 못한 일이며 상당한 정신적 노력을 요구한다. 변화된 환경이 무엇인지, 나의 정신적 태도는 어떠한지,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를 생각하고, 기존의 사유습성을 바꾸는 데 대한 본능적 저항감을 극복하려면 힘겨운 노력을 해야 한다. 지배적 생활 양식에 순종하면서 일상적 생존투쟁을 견뎌내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도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이 과업을 수행하기 어렵다. 풍요로운 사람들은 오늘의 상황에 불만을 느낄 기회가 적어서 보수적인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내일을 생각할 여유가 없어서 보수적인 것이다. 생활환경 변화에 적당한 압력을 느끼면서도 학습하고 사유할 여유가 있는 중산층에서 주로 가장 뚜렷한 진보주의 성향이 형성되고 표출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고령층이 청년들보다 더 보수적인 현상도 마찬가지 논리로 설명할 수 있다. 젊은이들은 기존의 제도와 사유습성에 노출된 기간이 짧으며 지적 활동이 상대적으로 왕성하다. 기존의 사유습성에 대한 집착이 덜하고 그것을 바꾸는 데 쓸 수 있는 정신적 에너지가 풍부하다. 반면 나이가 들수록 기존의 사유습성은 더욱 강력한 지속성을 지니며 그것을 바꾸는 데 쓸 수 있는 정신적 에너지는 부족해진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보수적으로 변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생물학적 필연이다. 역사의 중대한 고비마다 청년층이 낡은 제도와 지배적 사유습성, 전통적 생활양식에 반기를 드는 주체로 나선 것은 바로 이때문이다. 모든 사회에서 청년은 진보적이며 노인은 보수적이다. 고령 유권자들이 압도적으로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이다.
p192
새는 좌우 두 날개로 난다. 보수주의는 생물학적 본능이고 진보주의는 목적의식적 지향이다. 보수가 구심력이라면 진보는 원심력이다. 사회도 진보와 보수가 있기에 유지되고 발전한다. 진보주의자만 있는 사회는 안정성이 없을 것이다. 생활환경의 사소한 변화조차도 통제할 수 없는 사회적 혼란과 정치적 혁명으로 번져나갈지 모른다. 반면 보수주의자만 사는 세상에서는 혁신이 불가능할 것이다. 그 사회는 존립을 위협하는 심각한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절멸되는 종이 될 것이다. 사회가 건전하게 발전하려면 둘 사이에 적절한 균형이 이루어져야 한다.
p193 ###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주장이 있다. 조금 더 부드럽게 표현하면 진보는 단결하는 능력이 부족해 어려움을 겪는다. 보수주의는 현존하는 지배적 사유습성을 지키는 것이다. 익숙한 것을 수용하고 낯선 것을 배척하는 인간의 본능에 부합한다. 쉽게 단결하며 잘 무너지지 않는다. 무너져도 단시간에 수월하게 복원된다. 반면 진보주의는 새로운 사유습성을 창조하여 지배적인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운동이다. 진보는 본능을 거슬러 간다. 그래서 쉽게 단결하지 못하며 작은 오류만으로도 쉽게 무너진다. 한번 무너지면 복구하기 어렵다. 진보는 바람을 거슬러 나는 새, 물살을 거슬러 헤엄치는 물고기와 같다. 열정과 신념이 무너지면 바람에 날리고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가게 된다.
p194
과연 진보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진보는 무엇인가? 대표적인 견해를 몇 가지 살펴보자. 가장 좁은 의미의 진보는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다. 가장 넓은 의미의 진보는 인간 능력의 지속적 발전을 이루는 것이다. 둘 사이 어디엔가, 인간을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 진보라는 견해가 있다.
p195
마르크스가 부르주아지의 일상사를 처리하는 위원회에 불과하다고 했던 국가가, 김상봉의 주장에 따르면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부르주아 계급 자체가 아니라 그 최상층부인 재벌 기업 또는 재벌 가문의 이윤 추구를 위한 도구가 되었다. 재벌 기업에 의해 국가기구가 포위되고 장악되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국가가 기업처럼 변질돼버렸다. 우리가 목격하는 민주주의 퇴행은 국가 기업화의 필연적 결과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심으로 시민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고 싶다면 정부권력을 비판 할 것이 아니라, 국가를 모두를 위한 공화국이 아닌 사적 이익 추구의 도구로 만든 한국의 재벌 기업 체제를 해체할 궁리를 해야 한다. 자본주의 경제학 교과서 어디에도 노동자가 경영권을 가지면 기업 경영이 불가능하다는 이론은 없다. 국가의 주권이 시민에게서 나오듯, 기업의 경영자를 노동자가 선출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p197
진보는 어떤 자동적인 또는 불가피한 진행이 아니라 인간 능력의 계속적 발전을 의미한다. 진보에 대한 믿음은 인간 능력의 발전에 대한 믿음이다.
사회의 진보는 현존하는 제도를 조금씩 개선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이성의 이름으로 근본적인 도전을 감행하는 인간의 대담한 결의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카는 진보를 일으키는 근본적인 도전의 목표와 내용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결정된다고 보았다.
p198
진보의 범위를 넓게 설정하면서도 그 목표와 방법을 한결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으로는 <진보를 연찬하다>에서 이남곡 선생이 제시한 견해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이남곡에 따르면 진보는 인간이 행복을 위해 자유를 확대해나가는 과정이다. 이를 위해서는 자유를 억압하는 것들에서 인간을 해방시켜야 한다. 이것을 지향하는 것이 진보주의이다. 인간을 자유롭지 못하게 얽어매는 것이 세 가지 있다. 불합리한 제도, 물질의 결핍, 낡은 생각이 그것이다. 진보는 첫째,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제도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노예제도, 신분제도, 계급제도, 독재, 자의적인 국가폭력 등 불합리한 제도는 인간을 억압하고 자유를 박탈했다. 인간은 수맣은 사회혁명과 점진적 개량을 통해 자유를 증진해왔다. 둘째는 물질의 결핍에서 인간을 해방하기 위한 생산력 발전이다. 자유는 물질의 절대적 결핍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숨 쉬지 못한다. 따라서 과학기술의 발전도 진보에 큰 기여를 했다고 인정해야 한다. 셋째는 인간의 의식을 변혁하는 것이다. 남과 자연을 침범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남에게 먼저 양보하고 싶어하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ㅗ가학, 종교, 영성운동도 진보의 중요한 영역이다.
p199
진보는 현재 자신의 사유습성과 생활양식을 객관적으로 보고 그것과 환경의 변화 사이의 불일치나 부조화를 직시할 것을 요구한다.
베버는 정치를 "국가를 운영하거나 국가운영에 영향을 미치는 활동"으로 폭넓게 규정했다.
p204
국가의 텔로스를 실현하는 길을 어디에서 찾았을까? 종국적으로 시민 각자가 훌륭해짐으로써 인간으로서의 텔로스를 실현하는 것이 해답이다. 훌륭한 국가는 우연한 행운이 아니라 지혜와 윤리적 결단의 산물이다. 훌륭한 국가가 되려면 국정에 참여하는 시민들이 훌륭해야 한다. 따라서 시민 각자가 어떻게 해야 스스로가 훌륭해질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시민 각자가 훌륭하지 않아도 시민 전체가 훌륭할 수 있겠지만, 시민 각자가 훌륭한 것이 바람직하다. 각자가 훌륭하면 전체도 훌륭할 것이기 때문이다.
p205
아리스토텔레스는 훌륭한 국가, 선을 행하는 국가, 정의를 실현하는 국가를 요구했다. 홉스나 마르크스의 국가론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적절하지 않거나 비현실적인 요구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자유주의 국가론은 이것과 훌륭하게 결합할 수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그렇게 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위대한 개인주의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였다. 소로는 때로 국가의 필요성 그 자체를 부정하는 듯 보이지만 그의 주장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악을 저지르는 국가에 '시민의 불복종'으로 대항했디만 정부를 당장 폐지하라고 요구하지는 않았다. 그가 절실히 원했던 것은 '더 나은 정부' 였다. "각자가 자신이 존경할 만한 정부가 어떤 것인지 분명히 밝히는 것이 더 나은 정부를 얻을 수 있는 길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라며 국가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소로가 원했던 국가는 "모든 사람을 공정하게 대하고 개인을 한 이웃으로 존경할 수 있는 국가" 였다. 그런 국가는 소수의 사람들이 국가에 대해 초연하며 국가에 대해 참견하지도 않고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살더라도, 이웃과 동포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한 그들이 국가의 안녕을 해치는 자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열매를 맺고 또 이 열매가 익는 대로 떨어지게 허락해주는 국가는, 그보다 더 완전하고 영광스러운 국가, 상상만 했지 결코 보지는 못한 그런 국가가 탄생하도록 길을 열어줄 것이다.
p206
진보정치란 무엇인가? 진보정치는 국가를 어떻게 바꾸려 하는가. 이제 대답할 수 있다. 진보정치는 국가로 하여금 선을 행하게 하려는 활동이다. 직접 국가를 운영하거나 국가운영에 영향을 줌으로써 국가로 하여금 선을 행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진보정치의 목표이다.
p208
스위스 로잔 대학의 메랭 교수에 따르면 가장 엄격한 의미에서 복지국가는 "사회적 연대의 기능을 독점하는 국가"이다. 출산, 육아, 교육, 취업, 보건, 노후 등 시민들이 혼자 힘만으로 대처하기 어려운 과제를 해결하고 갖가지 사회적 위험에 대비하는 사회적 연대의 책임을, 그야말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국가가 책임지는 것이 복지국가이다. 사회적 연대의 기능을 독점한다는 뜻에서 완전한 복지국가는 존재하지 않으며, 역사적으로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다. 사회적 연대의 기능은 국가와 시민들이 함께 나누어 수행한다. 나라와 시대에 따라 국가와 시민이 담당하는 몫이 다를 뿐이다. 복지정책이 상당히 발달한 유럽 산업국가들도 점진적으로 국가의 몫을 늘림으로써 복지국가라는 이상에 접근해왔다.
복지국가의 주요 기능은 세 가지이다. 첫째, 국가의 규제를 통해 일정한 수준에서 시민들을 경제적으로 보호하는 것이다. 둘째, 조세징수와 보조금 지급을 통해 소득을 재분배하는 일이다. 셋째, 시장가격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서비스와 공동장비를 국민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같은 내용을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복지국가는 조직화된 권력으로 시장법칙을 세 방향에서 수정하는 것이다. 첫째 개인 또는 가족에게 노동의 시장가치나 재산 수준과 관계없이 최저소득을 보장하고, 둘째, 질병과 노령, 실업 등 개인과 가족이 감당하기 어려운 위험에 대한 불안을 감소시키며, 셋째 계급적 귀속이나 사회적 신분을 가리지 않고 모든 시민에게 일정한 수준의 사회적 서비스를 보장하는 것이다.
p212
사회는 선별적 복지와 보편적 서비스 둘 모두를 필요로 한다.
구체적인 제도를 보면 사회적 연대를 구현하는 복지정책은 세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는 사회보험이다. 우리나라는 국민건강보험, 노인장기요양보험, 국민연금, 고용보험, 산업재해보상보험, 이 다섯 가지 사회보험을 통해 질병, 고령, 실업, 산업재해와 같은 사회적 위험에서 국민을 보호한다. 국민연금은 장기 재정안정성에 문제가 있다. 국민건강보험은 보장율이 너무 낮다. 고용보험도 비정규직과 소규모 사업장에 사각지대가 있다. 장기요양보험은 아직 규모가 너무 작아서 수요를 감당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크고 작은 보완이 필요하지만, 이 제도들은 수십 년에 걸쳐 점차적으로 발전해왔으며 앞으로 더 발전할 것이다. 사회보험은 국가가 관리하면서 일부 재정지원을 하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모든 시민들이 가입하여 소득에 비례하여 책정되는 보험료를 납부하고 필요한 혜택응ㄹ 누린다는 면에서 시민들 사이의 수평적 연대를 실현하는 소중한 제도이다.
둘째는 공적 부고이다. 이것은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지며 국가는 사회보장, 사회복지의 증진에 노력할 의무를 진다"고 선언한 헌법34조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것은 어느 국민이든 소득과 재산이 적어 인간다운 생활을 누리지 못할 경우, 그 원인이나 책임소재를 가리지 않고 공동체의 지원을 요청할 권리가 있음을 의미한다. 대표적인 공적 부조제도가 김대중 대통령이 도입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이다. 스스로 최저생계비를 마련하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 제도의 혜택을 요구할 수 있다.
셋째는 보편 서비스이다. 이것은 어떤 정책수요를 가진 국민 모두에게 국가가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중학교까지 부모의 재산과 소득을 따지지 않고 모든 아이들에게 제공하는 의무교육은 전형적인 보편 서비스이다. 선별적 복지와 보편적 복지를 나누는 견고한 울타리는 없다. 공적 부조 형태의 선별적 복지 서비스를 모든 국민에게 제공하면 보편적 서비스가 된다. 영유아 보육비를 중하위 소득계층 만이 아니라 아이를 키우는 모든 가정에 제공하거나 기초노령연금을 65세 이상 모든 노인에게 지급하면 선별적 복지정책이 보편적 복지정책으로 이행하게 되는 것이다. 저 소득층 자녀들에게 지급하던 학교 급식비를 자녀를 학교에 보내는 모든 가정으로 확대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p215
다시 한번 강조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복지국가론은 하나으 독립된 이념체계 또는 첡학 차원의 국가론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위험에서 시민의 삶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가 적극 채택하고 실현해야 할 '제도와 정책의 조합'이다. 복지국가론은 우리가 이 책에서 살펴본 네가지 주요한 국가론과 많든 적든 조화를 이룬다.
<국가의 도덕적 이상은 무엇인가>
p220
정당하다고 간주되는 폭력을 독점한 유일한 인간공동체로서 국가가 지닌 힘에는 모든 폭력에 잠복한 악마성이 있다. 국가권력으로 선을 행할 수도 있지만 악을 행할 수도 있다. 게다가 국가는 개인과 다르다. 개인이 행하는 선과 악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국가가 행하는 선과 악에는 한계가 없다. 특히 악에 관해서 말하자면, 개인이 저지르는 악은 국가가 어느 정도 방지하고 응징할 수 있지만 국가가 저지르는 악은 누구도 쉽게 저지하거나 응징핮 ㅣ못한다. 그리고 실제로 국가는 선 못지 않게 크고 많은 악을 저질러왔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가 악을 저지르지 못하게 하고 더 많은 선을 행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사람들의 집요하고 목적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p221
니버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보면서 개인과 국가의 행동은 상이한 원리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판단을 내렸다. 개인으로서 사람은 서로 사랑하고 봉사해야 할 것과 서로 간의 정의를 확립해야 한다는 사실을 믿는다. 그런데 인종적, 경제적, 국가적 집단으로서의 개인들은 스스로 그들의 힘이 명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한다. 따라서 개인과 국가를 선으로 이끄는 도덕적 이상도 서로 다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p222
국가라는 가장 큰 공동체에 대해서는 개인과는 다른 도덕적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니버는 "사회에 요구할 수 있는 최고의 도덕적 이상은 정의" 라고 했다. 개인을 중심에 놓고 보면 최고의 도덕적 이상은 이타성이다. 그러나 사회는 여러 면에서 어쩔 수 없이 도덕성이 높은 사람들은 결코 도덕적으로 승인하지 않을 방법, 예컨대 이기심, 반항, 강제력, 원한 등을 사용해서라도 종국적으로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 이 두 도덕적 입장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으며 양자 사이의 모순도 절대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쉽게 조화되는 것도 아니다.
p223
개인에게는 이타성이 최고의 도덕적 이상인 반면 국가에게는 정의가 최고의 도덕적 이상이다.
국가가 실현해야 할 정의란 무엇인가? 플라톤은 건강하고 안정되고 통합되어 있는 국가가 정의롭다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의는 각자에게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는 것이었다. 권리, 소득, 기회, 부, 권력, 명예 등 사람들이 원하는 희소한 것들이 그것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에게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 정의이다.
p226
헌법은 무엇보다도 먼저 재산, 지위, 성별, 연령, 능력, 외모 등 그 어떤 차이가 있든 상관없이,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열거한다. 그리고 특별한 자격을 가진 사람만이 받을 수 있는 공직과 명예, 소득과 부담을 어떤 원리와 절차에 따라 배분해야 하는지, 그 원리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아울러 이 모든 것이 정의를 실현하는 완벽한 방법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교정하고 보완할 수 있는 가능성까지 열어두었다. 정의가 무엇인지, 국가로 하여금 어떻게 정의를 실현하게 할 수 있을지를 알아보려면 그 어떤 철학자의 위대한 저서보다 먼저 헌법을 읽는 것이 유익하다.
대한민국 국민, 인간이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나는 인간으로서 무엇보다 먼저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국가는 법률에 의하지 않고는 나를 잡아가거나 가두거나 처벌하지 못한다. 나는 고문할 수 없으며 나에게 불리한 진술을 하도록 강요하지 못한다. 법률에 따라 체포하는 경우에도 나는 가족에게 연락할 수 있고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범죄의 자백 말고 다른 증거가 없을 때 국가는 나를 처벌할 수 없다. 가족이나 다른 사람의 행위를 이유로 국가는 나에게 불이익을 줄 수 없다. 나는 내가 가고 싶은 곳에 가고 살고 싶은 곳에 살아도 된다. 나는 내 마음대로 직업을 선택할 수 있다. 사생활의 비밀을 보호받으며 남이 듣지 못하는 가운데 다른 사람과 통신할 수 있다. 내 양심에 따라 살면서 나는 내가 원하는 종교는 어느 것이든 믿을 수 있고 믿기 싫으면 아무 종교도 믿지 않아도 된다. 국가는 내게 특정한 종교를 강요할 수 없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원하는 방식으로 말할 수 있고 검열 없이 책을 낼 수 있으며, 국가의 허가를 받지 않고도 다른 사람과 함께 단체를 만들거나 집회를 할 수 있다. 내가 원하는 공부와 예술활동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
p228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똑같이 받아야 마땅한 것은 자유 말고도 더 있다. 나에게는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으며 일할 권리도 있다.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와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가 있다. 또한 보건에 관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 노동권과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 등을 묶어서 사회권적 기본권이라고 한다. 이것 역시 자유권적 기본권과 마찬가지로 국민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받아야 할 것에 속한다. 만인에게 이 권리를 실현해준다고 해서 정의가 전면 실현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 권리를 보장하지 않고서는 정의를 수립할 수 없다.
p229
대통령의 권한은 국회보다 훨씬 강하다. 국가폭력의 요체인 군대와 경찰을 지휘한다. 대통령은 국가의 원수이며 국가를 대표한다. 대통령은 국가의 독립과 영토보전, 국가의 계속성과 헌법을 수호해야 한다. 대통령은 행정권을 가진 정부의 수반이다. 대통령은 국가가 중대하고 긴급한 위난에 직면했을 때 법률과 같은 효력을 내는 명령을 내릴 수 있고, 전쟁이나 그와 비슷한 사태가 발생했을 때 계엄을 선포할 수 있으며, 비상계엄을 선포했을 때는 국민의 기본권과 사법부의 권능을 정지시키는 특별조치를 할 수 있다.
p234
자유로운 시장은 반드시 사회정의를 위협한다. 그렇다면 국가는 어떻게 이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가? 헌법은 그에 필요한 권능 몇 가지를 국가에 부여했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 국가는 성별, 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누구도 차별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국가는 어떤 형태의 사회적 특수 계급제도도 인정하지 않는다. 국가는 국민의 재산권 행사가 공공복리에 적합하도록 해야 하되, 공공의 필요에 따라 누군가의 재산권을 수용하거나 사용하거나 제한할 때는 법률에 따라 정당한 보상을 해야 한다. 국가는 모든 국민에게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제공하고 무상으로 의무교육을 해야 하며 평생교육을 진흥해야 한다. 고용증진과 적정임금의 보장에 노력해야 하며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최저임금제를 시행해야 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도록 근로조건의 기준을 법률로 정하고 여자와 연소자의 근로를 특별히 보호하며 고용, 임금 및 근로조건에서 부당한 차별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국가는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한 근로자의 자주적인 단결권, 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보장해야 한다.
p240
진보정치는 국가로 하여금 최고의 도덕적 이상인 정의를 실현하도록 하기 위해 국가를 직접 운영하거나 국가운영에 영향을 미치려고 하는 활동이다. 국가의 정의는 시민들로 하여금 각자가 마땅히 가져야 할 것을 받게 하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똑같이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을 만인으로 하여금 누리게 하고, 각자가마땅히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을 저마다 받게 만드는 것이 국가가 사람들 사이에 세워야 할 정의이다. 국가가 최고의 도덕적 이상인 정의를 완벽하게 실현한다면, 우리는 자유롭고 풍요로우며, 평등하고 안전하며, 평화롭고 환경이 깨끗한 사회에서 살게 될 것이다.
p242
나는 분명 자유주의자이다. 나는 이 모든 가치들이 하나의 사회 안에서 똑같이 존중받으면서 공존해야 하며,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나는 자유를 원하는 것과 똑같이 간절하게 정의를 소망한다. 그래서 자유주의 국가론이라는 땅을 딛고 정의를 실현하는 국가를 바라보며 나아간다. 이것이 내가 스스로를 진보자유주의자라고 말하는 의미다.
진보자유주의자는 어떤 가치 하나를 절대화하여 다른 가치를 종속시키거나 무시하는 것은 옳지 않아고 믿는다. 진보자유주의는 모든 형태, 모든 종류의 절대주의를 거부한다. 자유, 복지, 안전, 평등, 평화, 환경 등 헌법이 규정한 사회의 최고 목표 또는 최고 가치는 모두 평등한 지위를 가진다. 어떠한 우열관계나 종속관계도 인정하지 않는다. 어떤 하나의 가치를 절대화하여 다른 가치를 종속시키는 순간, 국가는 단일 가치가 지배하는 전체주의로 흐를 수 있다고 본다. 전체주의는 필연적으로 국가의 정의를 파괴한다. 진보자유주의자는 민주주의를 통한 사회개량의 길을 선호한다.
<정치인은 어떤 도덕법을 따라야 하는가>
p247
정치인이 지켜야 할 윤리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그들에게는 어떤 도덕법이 요구되는가?
p248
칸트는 모든 인간에게 적용할 수 있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도덕법을 세웠다. 반면 막스 베버는 직업정치인에게 신념윤리와 아울러 투철한 책임윤리를 요구했다. 칸트의 도덕법은 베버의 신념윤리와 맞닿아 있다. 직업정치인도 인간인 만큼 당연히 칸트의 도덕법을 준수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정치인에게는 그것을 넘어서는 특수한 윤리가 요구된다. 베버는 이것을 책임윤리라고 불렀다. 정치인에게는 책임윤리가 특별히 필요하다.
p250
칸트의 '자유'는 강제나 구속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칸트의 '자유'는 인간이 '경향성을 만족' 시키는 욕구의 노예로서가 아니라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부여한 법칙에 따라서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욕구가 이끄는 대로 가는 것은 자율적 행동이 아니다. 스스로 정한 목적을 향해 스스로 정한 규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자율적 행동이다. 도덕법은 이성적 존재인 인간이 자유를 사용하는 규칙이다.도덕법은 욕구의 만족이나 그 수단과 무관하다. 그리고 경험의 원리와도 무관하다. 도덕법은 순수이성의 직접적 명령이다. 인간은 경험의 도움을 받지 않고 다시 말해서 선험적으로 이것을 인식할 수 있다. 칸트가 <실천이성비판>에서 말한 것을 그대로 옮기면, "순수이성은 그 자체만으로 실천적이고 우리가 도덕법칙이라고 부르는 보편적인 법칙을 우리에게 준다."
칸트는 인간 행동의 도덕적 가치가 동기에 좌우된다고 보았다. 일반적으로 선하다고 인정받는 어떤 행동을 한다고 해서 그 행위가 언제나 도덕적 가치를 얻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다른 동기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옳게 행동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나왔을 때만 도덕적 가치가 있다. 예를 들어 불량부품을 쓴 자동차를 출시한 회사의 경영자가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자발적으로 공개 리콜하여 무상으로 수리해주고 필요한 보상을 했다고 하자. 이것은 정직한 행동으로 칭찬받을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도덕적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게 한 이유가, 고객을 정직하게 대하는 것이 회사의 신용도를 높여 장기적으로 회사에 더 큰 수익을 가져올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면, 여기에는 도덕적 가치가 없다. 그러나 오로지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는 의무감에서 리콜을 했다는 도덕적 가치가 있다. 자기의 이익, 바람, 욕구, 기호, 식욕 등 '경향성을 만족' 하려는 동기에서 나온 행동에는 도덕적 가치가 없으며, 오로지 의무감에서 나온 옳은 행동만이 도덕적 가치를 지닌다.
p252
칸트에 따르면 인간은 욕구의 노예가 아니라 스스로 정한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자유로운 존재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그 법칙을 알 수 있는가? 우리는 이성의 도움으로 경험하지 않고서도 그 규칙을 알 수 있다. 칸트는 이성이 직접적으로 그것을 명령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유명한 '정언명령' 이다. 너 자신의 "행동준칙에 따라 행동하되, 이는 보편적 법칙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할 수 있는 준칙이라야 한다." (정언명령1), 그리고 "나 자신이든 다른 어떤 사람이든, 인간을 절대로 단순한 수단으로 다루지 말고, 언제나 한결같이 목적으로 다루도록 행동하라." (정언명령2)
p255
진보주의자들 중에는 칸트의 도덕법을 준수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카트의 저서를 읽지 않고서도 스스로 정언명령 형태의 도덕법을 발견한다. 진보주의자들은 인간을 돈벌이 수단으로 삼아 착취하는 사회를 비판하면서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분투한다. 스스로 정한 행동준칙을 따르면서 그것이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는 것인지 성찰한다. 오해와 박해를 받고, 모략과 비방을 당하고, 때로 투옥과 죽음의 위험까지 감수하면서도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자신이 정한 삶의 목표와 행동준칙을 견지한다.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끌려가도 굴복하지 않는다. 목표를 실현하지 못해도 상관이 없다.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동기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벌이는 진보주의 활동의 동기는 어떤 이익에 대한 기대가 아니다. 그것이 옳다고 믿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투철한 진보주의자는 모두 칸트의 칭찬을 받을 만 하다.
p256
칸트의 도덕철학에서는 오로지 동기만이 의미를 가지는 반면, 정치는 동기보다는 오히려 결과가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정치인은 정당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없는 행동준칙을 따라야 할 때가 있다. 정치에서는 도덕적으로 훌륭하다고 할 수 있는 동기 때문에 한 행위가 최악의 참극을 초래하기도 한다. 오로지 칸트의 도덕법에만 의지할 경우 정치인은 의도하지 않은 죄악을 저지를 수도 있다.
현대 사회학의 창시자로 잘 알려진 독일의 막스 베버
베버는 국가의 본질적 특성이 폭력이라는 사실을 거듭 강조했다. "국가는 특정한 영토 안에서 정당한 물리적 강제력의 독접을 성공적으로 관철시킨 유일한 인간공동체이다. 정치는 권력에 참여하려는 노력 또는 권력배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노력을 의미한다."
p257
국가의 폭력도 틀림없는 폭력이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국가를 운영하거나 국가의 운영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활동하는 정치인에게는 특별한 자질과 윤리의식이 필요하다.
베버는 좋은 정치인이 되는 데는 세 가지 자질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보았다. 바로 열정, 책임의식, 균형감각이다. 열정은 어떤 대의에 헌신하는 객관적 태도를 의미한다. 지적 흥미를 느끼는 것에 낭만적으로 몰두하는 '비창조적 흥분상태'와는 다르다. 대의에 대한 헌신으로서의 열정은 또한 대의에 대한 책임의식을 일깨우는 것이어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내면적 집중과 평정 속에서 사람과 사물에 대해 거리를 두고 현실을 관조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거리감의 상실 또는 균형감각의 실종은 그 자체가 커다란 죄과이며 반드시 정치인을 무능의 길로 오도한다. 열정, 책임의식, 균형감각을 소유한 정치인은 충분한 자질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p260
진보주의는 신념윤리에 기반을 두고 있다. 진보주의자는 스스로 부여한 도덕법칙을 준수하면서 자기가 정한 목표를 일관되게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결과보다는 동기가 중요하다. 설혹 자기가 추구하는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고 해도 이기적 욕망 추구가 아니라 공동선을 추구하는 삶이 아름답다고 믿는다. 이것은 결과가 아니라 동기가 의미를 가지는 칸트의 도덕법이다. 이러한 도덕법을 따르는 진보주의자가 지식인으로 활동할 대는 큰 문제가 없다. 오로지 다른 사람과 논쟁할 뿐이다. 사회에 해를 끼칠 가능성이 별로 없다. 하지만 그런 진보주의자들이 정치에 뛰어들어 국가권력과 관계를 맺으려 할 경우에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그들에게는 오로지 동기가 중요할 뿐, 결과에 대해 책임지려는 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책임윤리의 부재가 빚어낸 정치적 비극은 무수히 많다. 나는 바이마르공화국의 비극도 여기에서 배태되었다고 판단한다.
p264
베른슈타인은 막스베버가 정치가에게 요구한 열정, 책임의식, 균형감각을 지닌 사람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일정한 '거리감'을 가지고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 혁명운동을 대했으며, 사회를 변혁하려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책임의식이 무엇인지 잘 인식하고 있었다.
p265
베른슈타인이 수정하려고 했던 이론의 핵심은 자본주의 체제 붕괴론이었다. 수정주의와 개량주의는 같은 것이다. 이론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수정주의는 정치적 실천으로 가면 개량주의가 된다.
p266
베른슈타인은 사회민주당 당원이며 지도자였다. 그가 수정주의자를 자처하고 나선 것은 단순한 이론적 모색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붕괴가 임박했으며 사민당은 임박한 사회적 대파국의 전망 아래서 전술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한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당의 활동을 왜곡하고 당의 입지를 축소시킨다고 판단했다. 여기에서 벗어나려면 파국론 신봉자들이 의존하는 <공산당선언>의 서술이 실제적인 사회적 변화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해야 했다. 베른슈타인은 자본주의가 곧 붕괴할 것이라는 관념을 버리지 않으면 그가 '사회주의적 현재 활동'이라고 불렀던 사민당의 일상적 정치활동이 제대로 가치를 지니지 못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붕괴의 관념을 버려야 '사회주의적 현재 활동' 이 노동자의 전투력을 대위기 때까지 보존하기 위한 임시적 수단이 아니라 중요하고 근본적인 사회개량을 준비하는 작업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단순한 선동이 아니라 법적, 경제적 입법투쟁을 중심으로 하는 의회활동과 실제적 입법이 높은 가치를 지닐 수 있다. 그리고 지방자치단체의 사회주의적 활동과 노동조합, 노동자소비조합 활동을 확장할 수 있다. 경제적 대붕괴에 근거를 둔 관념을 버리고 실제로 발전해온 그대로의 사회를 보면 이 모든 활동들이 이전과는 다른, 이전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지니게 된다는 것이었다.
러시아는 1917년 사회주의 혁명의 불길에 휩싸였다. 레닌을 중심으로 한 혁명주의자들이 국가권력을 장악했다. 치열한 내전을 걸쳐 탄생한 세계 역사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소비에트연방이 '사회주의 세계혁명의 조국'으로 등장했다. 베른슈타인은 현실에서 처절하게 패배했다. '베른슈타인 같은 자'라는 표현은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가장 지독한 욕설이 되었다. 수정주의와 개량주의는 정치적 파산의 운명을 선고받은 것처럼 보였다.
p268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생산수단의 국유화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체제를 세우려고 할 경우 "생산력의 엄청난 황폐화, 무의미한 실험들, 목적 없는 폭력행위 등과 같은 것만을 빚어낼 것이며,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지배는 사실상 혁명가 클럽의 폭력적 독재에 의해 지탱되는 혁명적 중앙권력의 독재형태를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한 베른슈타인의 예측은 소비에트연방을 비롯한 모든 사회주의 국가에서 현실이 되었다.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받아들이고 정치적 개량주의를 선택했던 독일 사회민주당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부활하여 여러 차례 집권하면서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다.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의 모든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베른슈타인이 말한 수정주의와 개량주의의 길을 걸었다. 그는 현실에서는 패배했지만 역사 속에서 승리했다. 무엇이 베른슈타인으로 하여금 수정주의와 개량주의를 선택하게 만들었을까? 나는 정치가로서의 책임의식, 자신의 이론과 자기가 하는 정치활동에 대해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며 성찰하게 한 균형감각이었다고 생각한다. 대의에 대한 열정은 컸으나 책임의식과 균형감각을 견지하지 못했던 많은 혁명가와 정치가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망각의 축복을 받았다. 오로지 신념윤리 하나만으로 국가권력을 휘둘렀던 정치가들 중 일부는 '인류에 대한 범죄자'로 역사에 남았다.
p270
정치인 베른슈타인이 마르크스와 근본적으로 엇갈렸던 지점은 국가를 보는 관점이었다. 마르크스에게 국가는 존재 그 자체가 악이었다. 민주주의 선거는 부르주아지들끼리 벌이는 계급 내부의 권력투쟁에 지나지 않았다. 정치는 국가의 성격을 바꾸지 못하며 사회혁명을 일으키지도 막지도 못한다. 국가는 오로지 소멸됨으로써만 인간의 자유와 해방에 기여할 수 있다. 그러나 베른슈타인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그에게 국가는 선한 일을 할 수도 있는 도구였다. 자유와 민주주의는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마르크스와 달리 베른슈타인은 자유를 부르주아지의 전유물로 보지 않았고 자유주의를 경멸하지도 않았따. 베른슈타인의 사회주의는 자유주의를 내포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차이였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이론가로 남았지만, 베른슈타인은 정치가로 살았다.
p271
베른슈타인은 세계사적 운동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주의가 시기적으로 자유주의를 뒤따라왔으며 정신적으로도 자유주의 사상의 적법한 상속자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사회민주당이 시민적 자유의 보장을 어떤 경제적 요구를 달성하는 것보다 항상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로운 인성의 형성과 보장이 모든 사회주의적 수단의 목적이며, 설사 그 수단이 외견상 강제성을 띠고 있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나는 사회주의자 베른슈타인에게서 존 스튜어트 밀과 장 자크 루소, 임마누엘 칸트의 그림자를 본다. 그는 자유주의 철학과 민주주의 정치제도의 개방적 성격에 주목했다. 완고한 신분제도 때문에 폭력이 아니고는 폐기할 방법이 없었던 봉건사회와 달리 자유주의 제도는 유연하고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자유주의 제도는 폐기할 것이 아니라 계속 발전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정치 조직을 만들어 정력적으로 활동해야 하며 혁명적 독재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민주주의 국민이 만들어져야 한다." 이것이 그가 사회주의 운동에서 얻은 교훈이며 확신이었다. 이런 확신에 의거해서 베른슈타인은 사회주의 운동가들에게 지성과 사상적 포용력을 요청했다. "노동운동이 필요로 하는 살마은 용감하고 조직적이며 총괄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서 밀알에서 겨를 가려낼 수 있을 만큼 높은 식별력을 갖추고 있어야 하고, 자기 묘판이 아닌 다른 곳에서 자란 식물도 감싸 안을 수 잇을 만큼 생각이 넓어야 하며, 사회주의 사상의 여역에서 왕이기보다는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공화주의자여야 할 것이다.
p272
이제 국가에 대한 일곱 번째 질문에 다시 한 번 대답해보자. 정치인에게 요구되는 윤리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막스 베버가 말한 책임윤리이다. 인간의 완전성과 선을 전제하지 않고, 인간과 사회를 있는 그대로 보면서, 자기의 신념에 따라 행동할 대 얻게 될 "예견할 수 있는 범위 내의 결과"를 자기 자신의 책임으로 껴안는, 그리고 행위의 동기가 아니라 결과로 책임지려는 태도이다. 이것이 반드시 칸트의 도덕법을 배척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강제력을 가지고 일하는 국가권력과 관계를 맺은 사람은 때로 칸트의 도덕법을 외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스스로 세운 행위의 준칙이 아니라 단순한 '끌림의 충족'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면서 '실용적 처세의 법칙'에 따라 살아가는 대중의 요구와 그들이 요구하는 행위의 준칙을 받아들여야 한다. '변질'의 위험을 안고 신념윤리와 책임윤리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는 것, 그것이 정치를 통해서 선을 추구하는 자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p274
국가의 도덕적 이상이 정의를 수립하는 것이라고 볼 경우, 진보주의와 자유주의는 연합할 수 있고 필요하면 언제든 연합해야 한다. 특히 국가주의 국가론을 따르는 시민들이 항속적으로 이념형 보수 정당을 지지하고, 자유주의 정당과 진보정당 가운데 어느 쪽도 혼자 힘으로 보수정당을 능가하지 못하는 우리 상황에서는, 연합하지 ㅇ낳고서는 보수주의 정당을 이길 방법이 없다. 더욱이 결선투표도 없이 최다득표자 한 사람만 대통령과 국회의원이 되는 선거제도를 바꿀 수 없는 상황에서, 자유주의 정당과 진보정당들이 저마다 나름의 신념윤리에 따라 당락에 상관하지 않고 자기의 '정당하고 옳은 주장'을 국미네에게 알리겠다며 후보를 ㅔㅅ울 경우, 보수정당의 승리는 비교적 확실하게 "예측할 수 있는 범위 안의 결과"가 된다. 책임윤리에 대한 베버의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이 결과는 '세상의 책임'이나 '어리석은 국민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것은 진보주의와 자유주의 정당과 정치인의 책임이다. 진보주의자와 자유주의자는 국가를 운영할 기회를 얻을 수도 없다. 국가 운영에 영향을 미치는 것조차 어려워 진다.
p279
진보세력은 단지 진보적인 데 그치지 않고 유능해야 한다.
자유주의 정당과 진보정당의 연합정치는, 막스베버의 말에 기대면 신념윤리가 아니라 책임윤리에 따른 정치행위다.
p282
정치는 단순히 신념을 표출하기 위한 공간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합법적 폭력을 보유한 국가권력과 관계를 맺는 행위이다. 로크의 말을 기억하자. "사회계약은 어느 한 사람이나 추상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사회의 다수파에게 권력을 양도하는 것"이다. 권력을 정당하게 양도받는 다수파가 오직 하나의 이념으로 뭉쳐진 집단이어야만 할 합당한 이유는 없다. 서로 다르지만 유사한 여러 이념의 절충을 통해 권력을 양도받을 다수파를 형성하는 것을 부당하다고 볼 근거도 없다.
진보의 힘이 '순수'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진보의 힘은 '섞임'에서 나온다. 진보를 추동하는 근본적인 힘은 인간의 보편적 이성이다. 사회의 진보는 인간 이성의 발전과 함께 이루어진다. 하나의 이념이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사회에서 이성이 성장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의 이념이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정치조직에서도 이성의 힘이 자라기는 어렵다고 믿는다. 다양성을 내포하지 않고서는 정당도 정치도 국가도 인간도 성장하지 못한다. 이념과 정치문화의 '섞임'을 통해 진보의 힘을 키우는 것이 연합정치이다. 연합정치가 지지를 받는 것은 국민들이 그 속에서 정치인의 책임의식을 보기 때문이다. 신념윤리에 투철한 정치인은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책임윤리에 투철한 정치인은 존경과 믿음의 대상이 된다. 자유주의자와 진보주의자가 대중의 존경과 믿음을 받는 길이 바로 연합정치에 있다. 연합정치를 통하지 않고서는 훌륭한 국가를 만들 수 없다.